윈슬러 호머, at the window
그 아이는 내게 따로 묻지 않고 카페모카 두 잔을 주문했다.
도심 한가운데, 그늘진 골목길을 지나가면 찾을 수 있는 작은 카페였다. 민들레 씨가 흩날리는 작은 정원, 바람 불 때 잠깐 웅크릴 수 있는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는 곳이었다. 주인 부부는 조용했다. 높은 천장 아래 자리 잡은 가구들도 얌전했다. "쌤, 여긴 진짜 그대로네요." 카페모카 두 잔을 받아온 그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은 우리가 근 1년 만에 다시 만난 장소였다.
우리가 이 카페에서 처음 만난 날, 나는 스물둘이었고 그 아이는 열일곱이었다. 그때 나는 수학 과외교사, 그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둘 다 각자 다른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였다. "아, 남자 쌤은 싫은데." 나를 처음 봤을 때 그 아이가 한 말이었다. "나도 말 안 듣게 생긴 애는 싫은데요." 내가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나와 그 아이는 첫 만남부터 엉망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때문에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만큼 서로에게 거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모범생의 삶을 이어가고 있던 나와, 자유 영혼을 만끽하고 있는 그 아이는 서로의 다른 세계에 호기심을 가졌다. "쌤은 쉴 때 뭐해요?" "책 봐." "헐." "너는 시험 기간인데 쉴 틈은 있냐." "넹. 많은데요." "헐." 주고받는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몇 달째 우리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 아이는 (적어도)학생일 때만큼은 내 성향을 흉내 내도 나쁘지 않겠다(?)는데 어느 정도 공감했다. "쌤, 근데 도스토스? 도리토스? 하여튼, 그 사람이 쓴 죄와 벌 재밌어요?"란 질문을 들었을 땐 전율이 일 정도였다.
나와 그 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 그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이곳에서 내려주는 카페모카가 마음에 들었다. 그 아이는 언젠가 뚱한 표정으로 "쌤, 이거 맛있어요?"라고 묻더니, 그런 다음부터는 "나도 카페모카요!"라며 맡겨놓은 양 당돌하게 외치곤 했다. 그 아이는 수업 도중 카페모카를 홀짝이다 말고 불쑥불쑥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나를 때로는 대나무숲으로 대하는 듯했다. 그 아이의 삶은 격정적이었다. 부모님과 교복 사이즈를 갖고 싸운 일, 선생님에게 휴대폰을 빼앗기기 싫어 반항한 일, 약속을 어긴 친구들에게 성질을 냈다가 되레 따돌림을 당한 일 등 사례는 다양했다. "그런데요…. 있잖아요…." 그 아이는 문제를 매기고 있는 내게 늘 이런 식으로 운을 뗐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카페모카를 홀짝였다. 그 아이의 수학 문제를 푸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되레 과외 시간은 더 길어졌다. 이야기가 길게 이어질 땐 할당량인 2시간을 넘어 3~4시간에 다다를 때도 있었다.
우리의 과외는 딱 2년이었다. 나는 그사이 일자리를 얻게 돼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그리고 이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 아이가 이제 막 스무 살로 접어들 때였다.
대학교에 가기 전 대학 생활을 묻고 싶다고 해 이뤄진 자리였다. 굉장히 대견스럽게도, 그 아이는 그 지역의 꽤 괜찮은 4년제에 합격한 상태였다.
"카페모카 맞죠? 쌤도, 여기도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래도 용케 괜찮은 곳에 붙었다고 하니 "덕분이죠. 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양 볼에 보조개가 푹 패였다. "여긴 그대로인데, 쌤은 폭삭 늙었네요." "아, 됐고." 그 아이는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패션 큐레이팅을 주력으로 하는 스타트업을 만드는 게 첫 목표라고 했다. 일단 동아리는 꼭 들어라, 교수님과 친해져라, 일주일에 한 번씩은 부모님께 전화해라…. 나도 모르게 '라떼'가 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런데요. 오랜만에 카페모카 마셨는데, 앞으로는 잘 못 먹겠어요."
뜬금없는 말을 한다. 여태 내 말은 안 듣고 있었느냐고 물으려는 찰나, 그 아이의 표정을 보고는 그 말을 쑥 집어넣었다. "쌤이랑 같이 이거 마시면서 수학 문제 풀던 때가 생각나네요. 진짜 오래된 일인 것 같은데, 또 생각해보니 얼마 지나지도 않았네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폴은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고는 그제야 잊었던 옛 기억을 떠올린다. 그 아이의 마들렌은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카페모카가 됐나 보다.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옛 기억을 종종 떠올리면, 그 자체로 좋지 않은가." 내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정말 많은 순간 죽고 싶어 했었어요." 그 아이가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그리고는 "가끔 제 삶이 정말 하찮아 보일 때쯤, 그런 시기가 찾아올 때 카페모카 한 잔씩은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그때는 진짜 억울한 일 많았어요."라고 입을 뗀 그 아이는 고르게 몇 번 숨을 내쉬었다. "엄마도, 아빠도, 학교 선생님도 무슨 일만 생기면 나만 쳐다봤어요. 내 말은 듣지 않고 혼부터 냈어요. 분을 못 이겨서 울면 뭘 잘했느냐고 또 다그쳤어요. 다들…." 그 아이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저 진짜 싸가지 없던 건 맞는데,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었어요. 쌤은 그래도 내 말 다 들어줬어. 그게 고마웠어요.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그래요." 우리는 그날도 카페모카를 몇 시간 동안 천천히 마셨다. 수학 문제가 없는데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열여덟, 열아홉 살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던데, 전 절대 아니었어요." 그 아이는 이제 아픔을 딛고 대학 생활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두 주먹을 쥐고 '파이팅'이란 제스처를 내보였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거야…. 내 편 같던 그 사람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뒤통수를 치고, 분명히 잘됐어야 할 많은 일은 실타래 엉키듯 꼬일 거야. 눈물 가득 고일 만큼 억울한 일을 겪고, 밤새 이불을 뻥뻥 차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질투 나는 일도 있을 거야…. 떠오르는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간 받은 상처에 알아서 척척 연고를 바르는 그 아이에게 해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넌 잘할 거야.” 꼭 해주고 싶은 말만 툭 던졌다. 그 아이는 다 안다는 듯 코를 찡긋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목을 젖혀 크게 웃었다.
'한때 그런 애도 가르쳤다….' 종종 카페모카를 마실 때면 여러 생각이 따라온다.
카페모카는 우유와 초콜릿이 더해진 에스프레소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느껴지는 찰나, 곧장 쌉싸름한 커피가 밀려온다. 그런데도, 카페모카를 끝까지 음미해 본 사람은 안다. 결국 그 끝 맛은 쓰지 않고 달다. 초콜릿 향은 커피보다 더 늦게 옅어진다. 그 아이의 삶도 그랬으면 한다. 많은 시련의 순간이 있겠지만 그 끝 맛은 결국 달콤하기를. 이제부터라도 있는 힘을 다해 행복해지기를.
소녀는 얼핏 봐도 도도할 것 같지요. 앞머리가 없는 포니테일 올림머리, 정갈하게 떨어지는 투톤 복장, 다리가 긴 의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세…. 소녀는 아무 표정 없이 무언가를 멍하게 보면서, 입술을 꼭 여미고 있습니다. 도도하고, 심지어는 냉정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눈여겨본 이라면, 이 소녀가 투명한 감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내리쬐는 녹색 햇빛, 잘 가꿔진 식물 곁으로 다가가 함께 있다는 점에서요. 그녀의 손에는 곱상한 흰 꽃이 보입니다. 꽃잎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킁킁 향기도 맡아보고…. 알고 보면, 꽃 한 송이로도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소녀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윈슬러 호머는 미국 출신의 사실주의 화가였습니다. 그는 이 소녀가 겉모습과 달리 여리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그리기 전 일부러 꽃 한 송이와 잘 정돈된 화분을 몇 개 안겨주지 않았을까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리기 위해서요. 호머가 그때 제 앞에서 카페모카를 홀짝이던 아이를 그렸다면, 필시 이와 비슷한 그림이 나왔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갖은 일들에 대해, 부디 자신의 모습을 간직한 채 잘 헤쳐나가기를…. 호머가 저 소녀를 바라볼 때 한 생각, 또 제가 그 아이를 바라볼 때 들었던 생각은 분명 같았을 것이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