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몇 번이라도, 널 따르는 하나의 존재

제임스 휘슬러,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_떨어지는 불꽃

by 이원율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밤하늘을 빤히 올려다봤다.


강원도 산자락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을 때 호스트가 가진 천체 망원경을 통해서였다. 매끈할 것 같던 보름달은 울퉁불퉁한 곰보빵 같았다. 새초롬한 여드름이 묻은 노란 볼살을 보는 듯도 했다. 하늘은 석탄 가루를 쏟아부은 것처럼 까맸다. 서늘한 바람이 마른 장작 냄새를 안고 다가왔다. 흩뿌려진 별은 눈을 맞출 때마다 반짝 빛을 냈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작은 집에서 야트막이 색소폰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하늘을 머릿속에 자국이 생길 만큼 본 일은 간만이었다. 우리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한참을 있었다. 괜히 목동 소년과 부잣집 소녀의 간질간질한 사랑을 그린 알퐁스 도데의 단편작 《별》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하늘에서 먼저 "야, 부담스러우니 이제 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지긋이 쳐다본 날이 있었다. 1999년 이승엽 선수가 사상 첫 50호 홈런을 때렸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9살이었다. 당시 대구 언저리에 살던 꼬마애가 그렇듯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었다. 특히 기가 막히게 홈런을 때려대던 이승엽은 내 우상이었다. "여기서 보면 다 보여. 이승엽이 쏘아 올리는 야구공도 볼 수 있을걸?" 아빠는 야구장 근처의 한 건물 옥상에 나를 데려다 놓고는 다독였다. 그때쯤 이승엽 선수가 뛰는 경기 표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짐작건대 그날의 아빠는 결국 암표마저 구하지 못한 숱한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무선 라디오의 중계 소리를 들으면서 난간에 기대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이승엽 선수, 드디어 시즌 50호 홈런을 쳤어요." 해설사 아저씨가 터뜨리듯 소리를 내지를 때까지 성실히 올려다봤다. 그런 뒤 하늘에서 펼쳐졌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이승엽 선수가 쏘아 올린 홈런 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아빠의 말은 거짓으로 판명됐지만, 그 대신 갖은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선수단인지 응원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승엽의 한국 신기록을 기념하기 위해 터뜨린 불꽃놀이였다. 야구장 위 하늘 한가운데 붉은 동백꽃과 노란 산수유가 만개하는 듯했다. 생애 처음으로 본 불꽃놀이였다. 화약 냄새마저 황홀했다. 9살 인생 중 가장 화려한 하늘이었다.


"정말, 지구에는 이런 곳도 있었구나."


아내 손을 잡고 간 신혼여행지는 하와이였다. 그간 허리띠를 동여맸던 우리 두 사람이 큰마음을 먹고 간 곳이었다. 줄어들지 않는 일을 처리하는 동시에 주말마다 지방을 오고 가야 했던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바삐 둘러볼 수 있는 견학지를 좋아하던 나는 하와이를 만끽한 후 '휴양지는 고리타분한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끗이 지웠다. 몸과 마음 모두 지친 상태에서 맞은 하와이는 말 그대로 신의 선물 같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날씨였다. 바람은 딱 적당할 만큼 시원했다. 공기는 딱 찐득하지 않을 만큼만 촉촉했다. 무엇보다도 높고 푸른 하늘에선 숨어있는 천국의 잔상이 엿보이는 듯했다. 뒹굴뒹굴하면서 놀던 아기 천사가 장난스레 구름을 열어젖히고는 혀를 쭉 내밀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내리쬐는 노을에 물들었다. 갈색, 빨간색, 주황색 물감이 희고 파란 도화지를 물들였다. 괜히 그 자체로 위로가 됐다. 그간 받아야 한 갖은 상처 중 두어 개는 옅어지는 것 같았다. 왠지 눈시울이 불거졌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이 하늘 덕에 앞으로 살아가야 할 무수한 날들에 맞설 용기가 생기는 듯했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브룩스는 감정에 차올라 자신의 방에 '브룩스가 여기 있었다(Brooks was here)'는 글을 남긴다. 그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브룩스가 죽을 용기를 얻었다면 나는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는 데서 다르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하늘 아래서 늘 잔잔한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백석의 시에서 묘사되는 여승(女僧)만큼 서글펐던 때도 많았다.


근 2년, 나는 온 세상이 하늘 같던 고지에서 삶의 푸른 봄날을 보냈다. 국방색으로 장식된 강원도 양구의 한 산꼭대기에서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부탁해온다면 정말 구름을 떼어다 주거나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하늘이 코앞에서 일렁거린 시기였다. 바다보다 하늘이 더 가까워 보였다. 그게 신기해서 또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수시로 야간 보초를 섰다. 그저 앞만 보고 걷을 뿐인데도 교과서에서나 반짝거릴법한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따위의 별자리를 볼 수 있었다. 귀를 대면 이들의 속삭임이 들릴 듯했다. 그때쯤 나는 하늘을 빤히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고 했다. 온갖 못난 생각들을 할 때였다. 지금의 내 생활은 다른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는 내 친구들보다도 조금 더 힘들어 보였다. "왜 하필 내 자식이어야 합니까." 한 여성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려고 한 자식을 열병으로 잃고선 신을 저주한다. "왜 하필? 그렇다면 굳이 네가 아니어야 할 이유는 있느냐." 신은 그렇게 반박한다. 불행을 못 견뎌 하는 이에게 교훈을 안겨주는 이 일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여성은 그 말에 바로 수긍을 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굳이 내가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태 이만큼 했으면…. 이만큼 했으면, 이제는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녀는 눈물범벅의 얼굴로 독을 품고서는 이렇게 신에게 지지 앉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심경이었다.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하늘을 보며 허겁지겁 추억을 먹어 치웠다. 하늘을 도화지 삼아 덜덜 떠는 두 손으로 미래를 조악하게 빚어냈다. "하늘이 젖는다…." 그 2년 동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노래 가사는 왜 그리 서글프게 들렸는지.



휘슬러.jpg 제임스 휘슬러,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 떨어지는 불꽃

밤하늘이 참 두껍습니다. 과자 부스러기가 흩뿌려진 것 같은 천장에서 끈끈한 질감이 느껴집니다. 굵은 실을 아낌 없이 풀어서 짠 양탄자처럼도 보입니다. 휙 잡아끌어 거실 한가운데 깔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늘이 있는 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중략)…하늘을 봤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평탄한 공간, 빛의 입지가 담겨있는 눈부신 하늘이 있었다." <츠지 히토나리, 냉정과 열정 사이>


하늘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따릅니다. 알고 보면 당신의 행복, 당신의 슬픔, 당신의 사랑, 당신의 이별을 모두 함께 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어디에 있든, 하늘이 있는 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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