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물요? 참 뜬금 없었는데

피에르 뷔야르, 쓰고 있는 소녀

by 이원율

2009년 연말, 우리 네 사람은 한 카페에서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했다.


우리들은 '빠른년생'이던 탓에, 대학생이 되고서도 술자리에 참여하지 못했다. 늘 튕겨 나와야 한 우리들은 "야, 그냥 우리는 커피나 마시자!"는 말 한마디로 함께 뭉칠 수 있었다. 시방 위험한 짐승처럼 철이 들지 않았던 우리들은 술도 없이 술이 있던 자리보다 더 즐겁게 떠들었다. 그런 우리 네 사람도 며칠 후면 진짜 성인이다. 이를 기념할 겸, 지난 한 해 소외당하는 서러움을 잘 견뎠다는 격려 차원에서 만든 선물 교환식이었다. 우리는 이날 각자에게 1만~2만 원대 안팎의 위로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나는 세 사람에게 각각 한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의 로고가 찍힌 상품권을 줬다. 가끔 과거가 그리울 때 쓰라는 뜻이었다. 한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숙취 해소 음료 세트, 또 다른 친구는 우리도 이제 철 좀 들어야 한다며 철분 영양제를 나눠줬다.


그리고, 우리 모임에서 ‘멍함’과 배시시 웃는 표정 짓기를 주 역할로 맡고 있던 한 친구는 각자에게 양말을 네 켤레씩 선물했다.


여름용 발목 양말 두 켤레, 겨울용 골지 양말 두 켤레였다. 색깔은 그간 각자를 대하면서 느낀 이미지에 맞춰 골랐다고 했다. 파란색도 있고 주황색도 있었는데, 내게 준 양말은 짙은 보라색이었다. 하여간, 모두가 '웬 양말…?' 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내 기억 오래오래 해줬으면 해서. 대학 생활의 첫해를 함께 보내줘서 고마워." 그 친구가 수줍게 고백했다. 우리 세 사람은 그 귀여운 발상에 깜짝 놀랐다. 그 친구의 말이 맞았다. 우리의 빠른년생 모임은 설립 취지가 옅어지자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는 헝가리로 장기 유학을 하러 갔고, 누구는 기약 없이 미얀마로 해외 자원봉사를 떠났다. 그러는 사이 가장 먼저 숙취 해소 음료 세트가 동이 났다. 그다음 분명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했던 철분 영양제가 어느새 사라졌다. 하지만 양말은 꽤 오랜 기간 함께 했다. 신는 날이든, 신지 않는 날이든 매일 아침 서랍을 열면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그 친구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간 받은 또 다른 귀여운 선물 중에는 달력과 시계도 있다.


2014년 말이었다. 고향 마을에서 서울의 한 동네로 완전히 이사를 해야 했을 때, 나와 함께 취업 공부를 하던 형, 누나들은 내게 탁상용 달력과 벽걸이 시계를 건네줬다. "자취방에서 날짜, 시간 볼 때마다 우리 생각날걸?" 와, 세상에 이런 신박한 생각을 하는가. 그들의 말도 맞았다. 달력 덕에 그들을 매일 아침 생각했고, 시계 덕에 그들을 매 순간 떠올릴 수 있었다. 종종 상사에게 혼난 날이 있었다. 또 가끔은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혼자 고민한 날, 앞길이 막막해 이불 속에 파묻혀 나오지 않았던 날, 월요일이 두려워 덜덜 떨던 날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 그들이 준 달력과 시계는 내게 묘한 위로를 전해줬다.


해가 바뀌어 달력을 바꿔야 하고, 시계는 진작에 고장 났는데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그때만큼은 같은 공부하던 형, 누나들이 기를 전해주는 것 같아서…." 오래간만에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름 용기를 내 말했더니 다들 큰소리로 비웃었다. 아씨, 괜히 말했다.




울림을 준 선물이라고 하면 손편지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나와 그 사람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우리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한 학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것 외에 큰 공통점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수학·영어, 그 사람은 국어·사회를 가르쳤다. 우리는 복도에서 잠깐 마주치면 겨우 인사만 했다. 때로는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차가움이 와닿기도 했다. 내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머리카락을 잘랐을 땐 그제야 살살 다가와선 "이발하셨네요"라고 말을 건넬 정도였다(그 사람은 늘 이를 '이발'이라고 표현했다). "국어 쌤은 말도 엄청 조곤조곤하고, 뭔가 우아해요." 아이들도 종종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은 학원 강사와 학생 구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관된 모습이었다. 그런 그 사람이 일을 그만뒀을 때, 학원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직접 쓴 편지를 전달했다. 동료 강사들은 물론 어린 학생들의 손에도 그 종이들이 전해졌다. 일찍 열어본 이들은 모두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뒤늦게 연 봉투 안에 담긴 편지에는 그 사람의 정갈한 글씨가 가득했다.


"저는 그나마 말보다는 글이 낫거든요. 이번에도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편지를 씁니다. 친구인 걸 아는데도,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어요.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낯을 가리는 제 성격 탓에 그러지를 못했어요. 잘 대해줘서 늘 고마웠습니다."


볼록 튀어나온 봉투에 손을 짚어 넣어보니, 알록달록한 곰돌이 모양의 젤리가 담긴 비닐이 툭 흘렀다. 그간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가 다가 아니었다. 대화가 서툴렀기에 직접 글을 써서 진심을 전해야겠다고 한 생각을 했다니, 의도가 너무 고운 것 아닌가. 세상에는 왜 이렇게 감동을 주는 선물이 많은지. 아, 그렇기 때문에 선물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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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감사 표시를 받아주세요, 우리는 분명히 다시 만날 거예요. 당신이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아주세요.” 『노발리스, 푸른 꽃 중 일부 발췌』


그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내 진심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또, 나를 잊지 않고 간직할 수 있을까. 며칠 밤을 고민한 그녀는 결국, 그간 떠올렸던 어떤 것도 사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집에서 가장 넓은 테이블에 종이를 쫙 펼쳐두고는, 손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집 앞 가게에서 과자나 살 것을 그랬네. 그러면 귀엽게라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상대에게 전하는 마음에 진심이 담길수록, 글을 쓰기가 더욱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이 문장은 너무 헛헛해서, 이 문장은 너무 쑥스러워서, 그렇게 편지지를 또 휙 날리고는 새롭게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그 정도면, 이미 당신의 마음은 한참 전부터 그들에게 전해졌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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