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위트릴로-클리냥쿠르의 교회 편]
누군가는 그가 광장 한복판에 털썩 앉아 스케치를 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가 강변에서, 누군가는 그가 교회와 병원 앞에서 정신없이 무언가 그리는 걸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그가 악취 가득한 쓰레기장을 옆에 둔 채 또 그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봤다는 이도 있었다. 이들이 한 말은 다 사실이었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Valadon·1883~1955)는 당시 프랑스 파리의 모든 장소에서 볼 수 있었다. 걸인 행색의 그는 붓과 연필, 종이를 든 채 파리 곳곳을 누볐다. 거기가 어디든 마음에 들면 망설임 없이 자리를 깔았다. 그러고는 눈앞 장면을 화폭에 옮겨담기에 무섭도록 집중했다. 사람들은 정처 없이 떠돌며 파리를 그리는 위트릴로를 이상하게 봤다. 어린 녀석이 벌써 낭인이 됐다며 혀를 끌끌 찼다. 술 냄새까지 폴폴 풍기는 그를 대놓고 휘휘 내쫓기도 했다. 그런데, 위트릴로는 그 수모를 겪고도 다음 날이면 또 거리를 걷고 있었다. 골목을 또 관찰하고, 눈에 보이는 걸 또 쓱쓱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 내놓은 그림도 일반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위트릴로의 그림은 단순했다. 명징한 주제도 없고, 화려한 기교도 없었다. 구도도, 표현기법도 제멋대로였다. 이러한 면은 그의 대표작 〈클리냥쿠르의 교회〉에서 여실 없이 볼 수 있다. 배경은 먹구름이 낀 듯 어둡고 축축하다. 교회 등 건물과 작게 그려진 행인 또한 전형적인 미(美)의 감정을 전하지 못한다. 교과서적 실력을 겨루는 살롱전(展)에 출품하면 탈락 반열에 오를 게 분명할 터였다. 사람들은 그가 삼류 예술가로 쓸쓸한 말로에 처할 것을 점쳤다. 어디서 객사하지만 않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여기곤 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이토록 천둥벌거숭이로 취급받은 위트릴로가 훗날 국가가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훈장을 받을 것이라고는. 나아가 조국을 대표해 권위있는 국제전에 참석하게 되리라고는.
의문투성이인 이 사내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왜 거리의 화가가 돼 골목길을 쏘다녔고, 어쩌다 그렇게까지 성공을 거둔 것일까. 위트릴로의 삶을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앞서서는 한 여인의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위트릴로의 어머니,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이다.
발라동은 한창때 화가들의 여신으로 불린 여인이었다.
그녀는 돈 없는 화가의 집결지인 몽마르트 언덕에 둥지를 튼 여성이었다. 새침한 얼굴과 요염한 몸매로 수많은 예술가를 홀린 직업 모델이었다. 1865년, 세탁부의 사생아로 출생한 발라동은 어릴 적부터 옷가게 점원에 웨이트리스, 서커스 단원 등 온갖 일을 경험했다. 이는 그녀를 더 강인하게, 보다 통통 튀게 만들었다. 몽마르트의 화가 모두가 그런 발라동을 곁에 두기를 바랐다. 그러나 발라동의 삶은 늘 잠정적이었다. 그녀는 상대 품에 안기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수많은 화실을 거쳤고, 그사이 수많은 남자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돌아오는 곳은 골목길 단칸방이었다. 눈치 빠른 발라동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평생 남자에 기대 살 수는 없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늙고, 병들고, 추해질 터였다. 당장은 모두가 그녀를 원하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발라동은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어엿한 예술가가 돼 보다 주도적으로 돈을 벌 생각이었다. 뜻을 굳힌 발라동은 이제 단순히 포즈만 취하지 않았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뭘 어떻게 하는지 훔쳐봤다. 남몰래 스케치도 몇 점 그렸다. 발라동은 이를 가깝게 지낸 몇몇 화가에게 보여줬다. 애석하게도 돌아오는 건 냉대가 전부였다. 이들 모두 '모델 따위'가 감히 그림을 넘본다는 자체에 조소를 머금었다. 발라동은 온갖 모욕에도 그림을 관둘 생각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 택한 붓질은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하루라도 무언가를 그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부터 발라동의 배가 차츰 불러오기 시작했다. 임신이었다. 화실을 전전한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뱃속에 생명을 품은 것이었다. 발라동은 1883년 겨울에 아이를 낳았다. 탯줄을 달고 나온 녀석은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를 자식이었다. 그렇게 사생아가 또 사생아를 품었다. 이날 빛을 본 아이가 위트릴로였다.
위트릴로가 평범하게 크지 못한 건 사실 발라동의 탓이 가장 컸다.
어머니 발라동은 위트릴로를 낳고도 자기 삶을 포기하지 못했다. 위트릴로는 대개 외할머니 집에 있었다. 눈 떠보니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어머니는 매일 매 순간이 바빴다. 애정 결핍에 절여질 수밖에 없던 위트릴로는 외할머니 곁에서 수시로 칭얼거렸다. 외할머니는 그때마다 부엌에서 무언가를 들고왔다. 이를 감기약 먹이듯 숟가락에 떠먹였다. 정체는 술이었다. 그녀 또한 늙고 지쳤기에, 차라리 손자가 알코올에 취해 잠들기를 바란 것이었다. 이러한 설 말고 학교 친구들이 술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술을 접하게 된 위트릴로는 잡히지 않는 엄마 손 대신 술병을 쥘 때가 많아졌다. 그렇게 차츰 중독의 길로 나아갔다.
위트릴로는 이미 십대 때부터 주정뱅이였다.
술 때문에 퇴학도 당했다. 직장에서도 해고됐다.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그는 벌써부터 제대로 살 가망이 없어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위트릴로는 이 시기에 그림을 접했다.
1903년,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된 위트릴로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그에게 그림 치료를 제안했다. 널브러져 술만 마시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는 일종의 궁여지책이었다. 피는 속이지 못했다. 어머니 발라동이 그랬듯, 캔버스 앞에 선 위트릴로 또한 회화의 세계에 풍덩 빠졌다. 좋은 일은 또 있었다. 위트릴로는 드디어 발라동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발라동은 꿈에 그리던 정식 화가가 돼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부유한 주식 중개인과 결혼한 그녀는 몽마르트 언덕에 개인 작업실도 두고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진 위트릴로는 그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는 발라동에게 회화의 기초를 배웠다. 발라동과 함께 센강변과 몽마르트 언덕의 풍경을 구경했다. 이때 눈에 담은 모든 것을 각자의 화폭에 옮겨 담는 시간도 가졌다. 위트릴로는 미친 듯이 그렸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수십 장씩 작업해 잔뜩 쌓아뒀다. 그만큼 좋았다. 가슴이 뻥 뚫린 듯 공허했던 위트릴로에게 발라동과 함께 한 이 시기는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역시나 길지 않았다.
발라동은 다시 위트릴로 곁에서 떠났다. 무엇이든 얽매이기에 싫은 그녀는 이번에도 위트릴로를 끼고 살 생각이 없었다. 위트릴로는 또다시 혼자였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옆자리를 재차 술병으로 채웠다. 그렇다고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위트릴로는 이제 술만 마시지 않았다. 술잔과 함께 붓과 물감도 들었다. 그는 떠나는 발라동은 잡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알려준 예술만큼은 꽉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위트릴로는 붓을 쥘 때만큼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발라동과 같은 어엿한 화가였다.
위트릴로가 거리의 화가가 된 건 이쯤부터였다.
뭘 그려야 할지 몰랐기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렸다. 언덕 위 가장 너저분한 골목까지 싹 다 화폭에 표현했다. 그렇게 매일 살았다. 이제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위트릴로는 더는 발라동에게 연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발라동은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바뀌지 않는 사람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원하고 매달릴 때마다 상처받는 건 그 자신뿐이었다. 물론 마음을 굳히기는 쉽지 않았다. 위트릴로는 술만 마시면 틀림없이 울먹였다. 신세를 한탄했다. 그를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읊으며 탁자를 세게 쳤다.
"위트릴로는 (…)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벌써 고주망태가 돼 시궁창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위트릴로는 울고 소리를 지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매정하게 위트릴로를 내쫓았고, 그는 쓰러진 채 신음하며 또 울었다."
프란시스 카르코가 쓴 〈위트릴로 평전〉에는 이런 문장도 쓰였다. 위트릴로는 그러고도 다음 날이 되면 또 붓과 이젤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서글펐지만, 그의 내면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삶을 저주하는 습관, 버릇처럼 생을 포기하려고 한 행태 따위는 모두 고쳤다. 그는 불행의 굴레에서 차츰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1913년, 서른 살의 위트릴로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결과는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대성공이었다. 원래 그의 그림 한 점은 고작 2프랑이었다. 개인전 이후 그 가격은 수백 프랑으로 껑충 뛰었다.
위트릴로의 거친 그림은 어떻게 보는 이의 마음을 끝내 흔들고 만 걸까.
그의 그림은 늘 투박했다. 단 한 점도 세련된 게 없었다. 여기에 대해선 모두가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는 다른 이의 작품에선 찾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시(詩)를 읽을 때나 느낄 법한 서정성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볼수록 진국이었다. 단 한 곳도 세련된 부분이 없는데, 가만히 보다보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 뭉근한 감정이 차올랐다. 특히 그의 〈백색 시대〉로 칭해지는 1908~1912년 사이 결과물이 압권이었다. 이는 그가 흰색 물감을 특히나 더 즐겨 쓴 시기를 뜻한다. 가령 그의 〈백색 시대〉 시절인 1910년에 그려진 〈코팽의 막다른 골목〉 또한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이처럼 분명 투박한데, 그림 한쪽에서 왠지 모를 애틋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노트르담 성당〉도 비슷하다. 위트릴로는 노트르담 성당을 굳이 웅장하게 그리지 않았다. 우두커니 선 성당은 고독해보인다. 벽면에 칠해진 흰색과 청색 탓에 창백해보이기도 한다. 여태 노트르담 성당을 이렇게 그린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외려 더 절절한 느낌을 준다. 그러고 보면, 그의 〈클리냥쿠르의 교회〉 또한 화려하지 않기에 되레 더 시선이 머물도록 이끈다. 짙은 우수를 품은 흰색을 찬찬히 더 음미하게끔 한다.
"상류의 주택가보다도 서민가 쪽으로 (…) 나는 사인(死人·알코올 중독에 따른 별명)이 된 후 회화의 비결을 깨우쳤다. 백으로 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당에 있는 침묵의 색? 백으로 칠해야 한다. 병원과 교도소의 색? 그것 또한 백으로 칠해야 한다. 나의 일생은 이러한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집들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백의 한가운데에서….“
위트릴로는 언젠가 이런 말도 했다. 이렇듯 흰색은 지친 그를 보듬는 색이었다. 세상과 타협할 수 있게끔 힘을 주는 색이었다. 위트릴로는 때때로 마음이 사무칠 때면 하얀 물감 위로 파리의 모래와 돌가루를 뿌렸다. 그런 뒤 오밀조밀 반짝이는 그림을 밤하늘 별 보듯 쳐다보곤 했다. 위트릴로에게는 〈백색 시대〉의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그토록 바란 발라동의 사랑이 계절 꽃처럼 잠깐 피었다가 사라진 때였다. 마음을 다잡고 있다가도 술만 마시면 눈물, 콧물이 줄줄 새던 때였다. 그런데, 돌아보면 위트릴로는 이 시기에 그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결핍과 쓸쓸함을 되레 영감으로 삼고 그만의 선과 색을 펼칠 수 있었다. 그래도 생을 내려놓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해왔기에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그 사이 발라동도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발라동은 이미 대가 반열에 선 에드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 툴루즈 로트레크(Toulouse Lautrec·1864~1901)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실력을 쌓았다. 최초의 아카데미 여성 회원, 최초의 국립예술학회 전시 등 여태 없던 기록도 세울 수 있었다. 발라동은 자유분방한 삶도 포기하지 않았다. 주식 중개인과의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와의 연애를 멈추지 않았다. 끝내 이혼을 당하고도 기죽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1914년, 마흔아홉 살의 발라동이 새로운 남편으로 택한 이는 스물여덟 살의 앙드레 우터였다.
스물한 살 나이 차도 그렇지만, 실은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우터는 위트릴로의 절친이었다. 즉,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발라동과 위트릴로, 그리고 우터는 한때 한 지붕 밑에서 살았다. "저주받은 삼위일체." 사람들은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위트릴로는 또다시 기묘한 관계에 휘말렸지만, 그는 더 이상 발라동을 원망하지 않았다. 위트릴로는 그저 자기가 할 일을 했다. 늘 그랬듯 몽마르트의 풍경을 관찰했고, 이를 그림으로 옮겨 표현했다. 그게 다였다. 위트릴로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일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다.
발라동은 그런 위트릴로의 초상화를 그려준 적이 있었다.
1921년, 위트릴로가 서른여덟 살을 맞이한 때였다. 갈색과 녹색이 대담하게 칠해진 이 그림에서 위트릴로는 잘 정돈된 머리와 다듬어진 콧수염,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 앉아있다. 한 손에는 붓을, 다른 손에는 팔레트와 여분의 붓 네 자루를 함께 들고 있다. 반짝이는 두 눈의 그는 말쑥한 차림새의 잘나가는 화가처럼 보인다. 한때 몽마르트의 하수구에서 휘적대던 주정뱅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발라동 나름대로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간 행태를 놓고 아들에게 사과한 것일 터였다.
발라동이 빚은 스캔들과 상관없이 그림을 이어간 위트릴로는 〈백색 시대〉 이후 〈다색 시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위트릴로는 이제 화폭에 광택이 나는 색채를 담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녹색을 강조했다. 이는 모든 일을 달관해 한결 평화로워진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도 했다. 〈다색 시대〉의 대표작은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사크레쾨르〉다. 파리의 풍경이 담긴 이 그림에는 그의 〈백색 시대〉 작품과 달리 생기가 가득하다. 밝은 갈색과 주황색, 초록색이 발랄함을 더해준다. 동화책 삽화 내지 관광지에서 파는 엽서의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위트릴로의 〈다색 시대〉 그림은 옛 작품보다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삶은 그때보다 훨씬 좋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위트릴로는 1935년, 그림 수집가이자 부유한 미망인이었던 여인과 결혼했다.
아내는 배려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위트릴로는 그녀 덕에 그간 부족했던 사랑과 관심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위트릴로 평생의 애증 상대였던 발라동은 1938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 위트릴로는 기도실에 틀어박혀 두 손을 모았다. 그는 발라동 평생의 일관된 삶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용서하려고 노력했으며, 이제는 부디 편한 곳에 가서 쉴 수 있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와 얽힌 모든 것을 훌훌 털 수 있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위트릴로의 영광은 이어졌다.
파리의 주정뱅이였던 그는 파리 최고의 화가로 거듭났다. 위트릴로는 마흔다섯 살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아울러 1950년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에 뽑히는 기쁨도 누렸다. 그 유명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등과 함께 작품을 걸 수 있었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태어나고, 몽마르트 언덕에서 생의 희로애락을 겪은 위트릴로는 1955년 일흔 다섯 살 나이로 몽마르트 언덕에 묻혔다. 사인은 폐충혈이었다.
"나는 내 작품에서 시든 꽃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황폐한 사원의 꺼져버린 초의 냄새를 풍겼으면 좋겠다. 비록 내가 그린 가난한 집이 현실에서는 허물어진다고 해도…."
위트릴로는 언젠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그는 상처받은 모든 이를 위한 화가였다. 발라동의 사랑을 한 번도 배 터지게 받은 적 없지만, 되레 이런 결핍을 동력으로 누구보다 절절한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삶을 증오하는 데만 힘 쏟지 않는다면, 그 어떤 길이든 열릴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거장이었다. 그의 시든 꽃 같은 처연한 작품은 지금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건네고 있다.
〈참고 자료〉
수잔 발라동, 문희영, 미술문화
위트릴로, 유준상, 서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