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의 또 다른 이름

차 한 잔이 건네는 작은 위로

by 마침내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힘들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쩐지 불안해지고 금세 조급해진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도 괜히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잠깐의 여유에도 두리번거리며 일을 찾게 된다. 몸도 마음도 안절부절못할 때 나는 조용히 차를 내린다. 나에게 그 시간은 단순한 행위의 시간이 아니라 ‘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늘도 차를 고른다. 하얀 전기포트에 물을 가득 넣고 버튼을 누른 후 창밖을 바라본다. 처음 이 집에 이사를 왔을 때는 저 멀리 산이 보였다. 그러나 몇 년 사이 아파트 숲에 가려져 산 숲이 사라졌다. 내 눈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산의 끄트머리를 찾는다.


물이 뽀글거리며 정적을 깬다.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차 한 조각을 자사호에 넣는다. 세차를 하고 다시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린다. 단순한 일 같지만 그 시간엔 묘한 집중력이 생긴다. 차가 거름망을 통해 걸러지는 동안 묵직한 향이 천천히 퍼져 나간다. 초콜릿 향 같기도 하고 견과류 향 같기도 하다. 낯선 향기와 익숙한 향기가 어울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 모금 마시며 차에는 휴식의 향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후배가 물었다.

“집에 있을 때 뭐해요?”

나는 특별한 일 없으면 책 보고, 밥 먹고, 운동하고. 그리고 차를 마신다고 했다.

“가만히 있지를 않네. 차 마시는 것도 뭔가를 하는 거잖아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몇 시간 있어 봐요.”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제대로 쉬려면 멍 때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자주 필요해요.”


그 말에 한동안 생각이 머물렀다. 차를 마시는 행위도 결국 움직임은 맞지만 그 시간은 차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다. 잡생각이 사라진다. 나는 이 정돈된 시간도 피곤한 일상에서 잠시 물러서는 깊은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차를 제대로 마시게 된 것은 절에서 근무를 하면서였다. 스님은 매일 다른 차를 맛 보여줬고, 그 시간이 이어지면서 차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차에 대한 이론 지식은 없어도 좋은 차에 입맛은 길들여졌다. 같은 차를 마셔도 매일 맛과 향이 다르다. 차의 양이나 온도도 이유겠지만 그날의 기분도 한몫 단단히 한다. 매일 다른 차를 마시면서 오늘은 맛이 어떨까. 기대와 궁금증으로 차를 내렸다.


저녁에 차 마시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좋아한다. 잠 안 오지 않느냐, 화장실 자주 가고 싶지 않으냐, 속 아프지 않냐 물어보는데 내 경우엔 커피보다 잠의 질에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저녁엔 생차보다 숙차를 마시고, 혼자 마시는 차의 양은 많지 않아 문제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차를 마시면서 초의선사의 동다송을 읽게 되었다. 동다송에는 차는 혼자 마실 것을 권했다. 그 뜻은 차를 마시며 수행하라는 것이지 혼자서 차 마시는 즐거움에 빠지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난 혼자서 마시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니 마음공부는 틀렸나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휴식이었던 시간도 분명히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데 언제부터 쉬는 일이 힘들어진 걸까. 무엇에 그렇게 쫓기고 있는 걸까.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불안감.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는 습관. 그런 강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차 한 잔을 천천히 우려내는 시간이 말해주고 있다.

‘괜찮아, 좀 쉬어가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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