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1> 우정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의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왔을 때 나의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사회에 이제 막 발을 내딛을 무렵이었다. 이 작고도 큰 도시에는 옛친구도, 친척도, 건너건너 아는 이도 없었다. 삶의 균형을 찾고 새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기간 뉴욕과 서울 사이 장거리 연애를 하던 파트너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으나, 모든 것을 다 함께 하려는 나의 모습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한국어를 못하는 파트너에게, 매운 것을 잘 못먹는 파트너에게, 너는 왜 나랑 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무한도전을 보려 하지 않느냐고 타박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친구를 만들기 위해 막상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알수가 없었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그때 L이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세상의 모든 우정에는 두 가지 종류의 친구가 있어. 체이서(The Chaser, 쫓는 사람)과 체이스드(The Person Being Chased, 쫓음을 당하는 사람.) 체이서는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이야. 먼저 상대에게 연락해서 무언가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고 우정을 성장시키려 노력하지. 체이스드는 반대로 이끌림을 당해주는 사람이어서 상대의 계획과 제안에 응해주는 사람이고. 내가 보기에 너는 그동안 주로 체이스드 형의 친구로 지내왔던 것 같아.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만큼 친구들의 욕망을 잘 들어주고 유연하게 관계에 응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서 조금 더 많은 것을 얻고 재미있게 살아가려면 체이서의 역할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주 논하지는 않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우정의 네트워크에 대한 고유한 모델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나의 대학동기는 "친구" 아니면 "남"의 단순하고 명쾌한 이분법적 모델로 우정을 바라보았다. 몬트리올, 덴버, 런던, 뉴욕, 싱가폴 등 여러 도시와 국가를 오고가며 살아온 한 친구는 수평선 위에 지리적으로 친구 그룹을 분류해 놓았다. 회사동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을 빌려 우정을 세가지 층위에 놓았다:회사동료나 학부모, 이웃같이 상호이익을 전제로 한 실용적 우정, 그 위에는 이유없이 그저 같이 놀려고 만날 수 있을만큼 순수한 즐거움을 나누는 우정, 그리고 가족처럼 나의 비밀을 속속들이 아는 최상위 우정인 평생우정. 교회 친구, 회사 동료 친구, 학교 동창 처럼 교우관계를 형성한 계기나 환경에 따라 그룹을 나누고 마치 자아를 분열시키듯 그들을 철저히 분리된 세계에 두는 친구도 있었다.
L의 체이서와 체이스드(The Chaser vs The Chased) 모델 이론은 그동안 들어봤던 그 어떤 우정 네트워크 모델 보다도 간단 명료했지만 머리를 망치로 맞는 느낌이 들 만큼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 나서려다 주저하고 망설이던 마음을 동기부여로 꽉 채워줄 만큼. 그래. 내가 그동안 인간관계에 너무 수동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차피 인연하나 없는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하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는게 맞지.
체이서와 체이스드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주의 주말, 나는 L을 끌고서 사교 모임 플랫폼 밋업닷컴(meetup.com)에서 홍보중인 샌프란시스코 토요 도시 등반(San Francisco Saturday Urban Hiking) 모임에 참석했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와 이스트베이(East Bay, 버클리와 오클랜드가 있는 지역) 사이에 위치한 예바 부에나 아일랜드(Yerba Buena Island)라는 작은 섬이었다. 섬 자체가 산이라고 불리기엔 부끄러울만큼 작은 숲언덕이었다. 시끄러운 바에서 차갑게 땀을 흘리며 식어가는 잔을 부여잡고 서서 낯선 사람들과 적막을 채우려 필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아이디어 같았다.
토요일 아침, 산 입구 앞에는 서른 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가복 차림의 아담한 중년 아시안 여성이 나와서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한 시간 정도 함께 걸어볼거에요." 강단이 있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간단한 소개를 마친 그녀는 작은 깃발을 번쩍 들고 길을 나섰다. 등산은 기대와 달리 낭만적이지도 고무적이지도 않았다. 그 작은 "산"은 베이브릿지 바로 아래에 있어서 차량의 소음과 매연으로 가득했다. 등산로는 잡초로 무성했고 쓰레기도 군데군데 보였다.
'어색한 마음에 부정적인 것에만 시선이 가는 걸꺼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늘의 목표인 친구 만들기를 수행하기 위해 말을 걸만한 참가자들을 찾았다. 멀리 바 한 구석에서 가만히 서서 술잔을 들고 서 있는 사람보다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오르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훨씬 멀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때였다. 바에서는 대화가 벌어지는 그룹에 다가가 "저도 껴도 될까요" 라고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지만, 함께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등산로에서 굳이 자리를 옮겨 말을 거는 시도는 영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이 주는 용기, 떨리는 입술과 억지 미소를 가려주는 바의 어두운 조명의 도움 없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고 있자니 나의 외로움과 우정을 향한 좌절된 마음이 적나라하게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네 어르신들이 등산 모임 끝에 꼭 술자리를 만드는구나 싶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가장 친근해 보이는 얼굴을 한 참석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그는 밝게 화답해주었지만, 바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질문을 건네야 할지 몰랐고, 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등산 좋아하세요?" 라고 묻기에는 오늘의 '등산'이 너무 초라했고,
"어디 사세요?" 라고 묻자니 신상조사 같았고,
"토요일에는 주로 뭘 하세요?" 라고 물어보려니 뜬금없어보였다.
이 모임이 만약 "등산 중독자들의 모임 (등산 트래킹하는 앱 뭐 쓰세요?)" "불교인들의 관세음등산 (어느 절 다니세요?)" "이민자들의 토요일 아침 네트워킹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었다면 첫 질문을 건네는게 조금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와 나 사이에는 첫질문의 맥락을 형성할만한 공통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해서인지 더워서인지 알수 없는 이유로 땀범벅이 되어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는 우리들의 혼돈의 대화를 마침내 멈춘 것은 다름아닌 경찰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연방 소유의 국유지를 침범하고 계십니다. 당장 이곳을 떠나주세요."
경찰들은 우리가 잠재적 범죄자라도 되는듯 엄중하게 말했다. 나중에 알게된 거지만 이 섬은 세계 2차 대전 때 해군들의 중요한 훈련 및 주거 기지로 사용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등산하거나 피크닉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시민들도 없었다. 우리 빼곤 말이다.
놀란 참석자들이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마음이 급해진 요가복 차림의 아담한 리더는 깃발을 내리고는 서둘러 주머니에 있던 자신의 명함을 뿌리기 시작했다.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마사지 / 요가 / 명상 전문가 - 무료 상담 전화하세요."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이런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지난 주에 도시에 이사왔어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을 사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I am a Korean and new to town. Where do I meet Koreans?)"
가장 많은 투표를 받은 답변은 이거였다. "한국인 교회를 가세요."
실제로 한국인 인구가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San Francisco Bay Area,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버클리, 산호세 등 샌프란을 중심으로 한 여러 근교 도시를 하나의 권역으로 부르는 말)의 다른 도시에 비해 적은 편인 샌프란시스코 내에서도 한국어 간판을 단 교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회 만큼 이방인을 환대하고, 그의 정착을 돕는 커뮤니티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교회는 정기적으로 만나니 우정을 만들어가는 일도 수월하고 말이다. 신도가 아니어도 믿음을 가져볼까 고민해볼 찰나에 한국인 이방인은 또 이런 경고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이민을 가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바로 한국인 동포에요. 외롭거나 힘들다고 한국인을 무턱대고 사귀지 마세요."
한인 교포들의 모임인 캅스(The Korean American Professional Society, The KAPS)는 교회의 신앙도, 정치색도, 숨겨진 아젠다도, 어두운 과거를 떨치고자 도피이민을 한 한국인도 없는 안전한 커뮤니티인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모임의 첫 방문을 앞두고 어느 곳에서보다도 긴장했다. 이제 막 한국에서 날아온 '찐한국인'에 눈에 교포들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만나본 미국 교포들은 어떤 때는 날카로울 만큼 개인적이고 이성적인 서양사람들이었고, 또 어떤 때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보다 더 보수적이고 전통을 고수하는 한국사람들이었다. 언제 어디서 그들 내면의 '서양인'스러움과 '한국인'스러움이 발휘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 모임이 어떤 분위기일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이를 물어보면 실례인 자리인가?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인가 아니면 그냥 교포라는 정체성 아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인가?
나는 얼마만큼 한국인이어도 되는걸까?
걱정과 달리 멤버들은 나를 환대해주었다. 쭈뼛해하는 내게 그들은 미국 특유의 직설적이고 명쾌한 태도로 질문을 건네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의 화려한 경력이나 거대한 직장 혹은 학교를 뽐내지 않고 차분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들과 어울리며 나는 교포라는 정체성도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배웠다. 스펙트럼의 한 끝에는 '한국인'이, 다른 한 끝에는 '미국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저 성장환경과 성격, 가치에 따라서 그 선상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 재단한다는 것은 알기 힘든 일이다. 벌써 10년 전의 일을 돌이켜보고 있는 나 역시도 현재 내가 그 스펙트럼 위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하다고 말한 어떤 남자분은 김치와 갈비탕과 만두 만들기의 대가였고, 몇십년 미국에 살면서 성공적인 로펌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분은 내가 생각했던 '미국인'의 이미지와 달리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았다. 한사람 한사람 알아가면서 "애매한 미스터리"라고 선을 그어버렸던 그들의 양가적 성향은 사랑스럽고 흥미로운 개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쓰는 비율이 저마다 달랐던 것처럼 한국의 가치와 미국의 가치를 섞는 그들의 포물라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오랜 세월 걸쳐 만들어낸 진주와 같은 결과일테니.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우리가 같은 '스펙트럼'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나와 같은 낯선 참석자들을 선뜻 자신의 공간으로 환대했다. 나는 그들의 집으로, 그들이 즐겨 찾는 레스토랑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 그들의 차로 초대받았고, 그렇게 누군가의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들이며 샌프란시스코에 동화되고 있음에 안도했다.
지금의 내가 그 그룹의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더 깊은 우정을 쌓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인연의 귀함을 더 소중하게 음미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너무 어렸고, 불안이 많았고,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싶어했다. 다시말해, 나도 그들처럼 얼른 자리잡고 싶다는 열등감, 더 다양한 피부색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도전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미국생활에 대한 판타지, 무엇보다도 나의 한국어를 절대로 못알아들을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영어가 늘 수 있을 거라는 고집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마음 앞에서 나는 그들의 따뜻한 초대장을 받아든 채 다른 모임을, 다른 친구만남의 기회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