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영어와 얕은 경력으로도 실리콘 밸리에 입성하고 싶다면
스타트업이 잔뜩 들어선 샌프란시스코 소마(SOMA)지역. 그 한가운데 고요하게 서있는 스타벅스 리저브 바에 그녀와 내가 마주보고 앉아있다. 그녀는 자리에 앉고서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 마주 앉아 있었다. 초면에 솔직하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고 대화의 템포를 조절하려 하는 용기에 나는 조용히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같은 대학원 같은 전공을 1년 먼저 졸업하고 무사히 취직을 한 선배를 만나 취업 팁을 들어보고자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두시간 전, 악수를 나누기가 무섭게 이 낯선 선배의 손에 끌려 스타벅스에서 마련한 디자인 토크에 참여했다. 무대 위 연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노트 필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이벤트가 아니었다. 스타벅스 매장 디자인 총괄 디렉터들과 참여자가 카페 가운데에 마련된 매끈한 바 테이블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카페인이 가득찬 콜드브루를 마시며 사용자 경험과 브랜드 철학과 윤리적 디자인에 대한 대화를 높은 밀도로 나누는 시간이었다.
사실 그런 이벤트로 우리의 첫만남을 시작했던 것은, 그녀 만큼이나 나도 애초에 “일회성 멘토십”의 대화의 결을 다듬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 졸업과 취업을 동시에 해낸 덕분에 후배들에게 조언을 주어야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들은 절박함과 불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자신감을 가져라!’ 식의 충고를 주어야 하는 위치가 생각보다 불편하고 어려웠다. 취업을 해도 배움은 끝이 없고, 여전히 어딘가로 향하는 열쇠를 찾아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나 하나의 운좋은 경험을 마치 성공의 공식삼아 다른이들을 설득하려는 것 같아보일까봐 조심스러웠다. 디자인 토크에 함께 참석하여 같이 무언가를 배워보는 것으로 나의 속내를 먼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이 없다는 말로 운을 뗐다.
“올해 초에 졸업을 하고 인턴십 비자를 받았어요. 6개월 안에 풀타임 포지션을 구해야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데 도저히 취업이 되지가 않아요. 지금까지 무려 120군데가 넘는 회사에 지원을 했다구요. 그런데 아무데도 절 안받아줘요. 경력이 없어서래요. 이러다가 일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생겼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흔히 본 아시안 디자이너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게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다. 항상 강의실 앞줄에 앉아 빼곡히 필기를 하고 밤을 세워가며 과제를 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정성스레 포트폴리오를 다듬고 최대한 많은 곳에 부지런히 이력서를 보낸다. 한마디로 참 좋은 학생들이다.
그러나 막상 사회로 나가면 ‘좋은 학생(good student)’이라는 별명도, 올A학점도, 가지런히 정리된 프로젝트 폴더들과 노트필기도 쓸모가 없어진다. 고용주들은 ‘여태 일 경험도 하나 안쌓고 뭐했냐’ 라고 그들에게 오히려 되묻는다. 회사는 외국인이 타국으로 건너와 언어를 다듬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도시에 적응하는 그 모든 도전들을 경력으로 쳐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력서에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경력이란걸 어디서 부터 어떻게 쌓아야 하는건데요? 제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든다고 면접까지 불렀는데도, 결국에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퇴짜를 놓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경험이 부족한게 절대적인 사실이니까. 그들한테는 그게 가장 쉬운 변명이라 그래요.”
뜻밖의 건조한 대답에 그녀의 눈이 바로 휘둥그레 해졌다.
“회사 경험이라는 것, 정말 무시 못해요. 저도 지난 회사생활을 돌이켜보았을 때 배운게 엄청나게 많거든요. 1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정말 다른 사람이에요. 학교에서 2년간 배운 것보다 열 배도 더 많은 것을 회사에서 1년 동안 배웠어요.
배움에는 지식이나 스킬 뿐 아니라 직장인의 센스라는 게 있어요. 의사결정의 효율성, 혼자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동시에 팀원들과 협력할 수 있는 사회성,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런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누군가를 ‘프로페셔널하다’ 혹은 ‘같이 일하고 싶다’ 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거든요. 다시 말해, 누군가의 경력은 단지 몇 년 간 어떤 타이틀을 지녔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의사소통 능력, 태도, 리더십, 센스 등의 프로페셔널함의 집합인거에요.
회사들이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을 했다면 당신의 작업물에서 재능을 발견했다는 뜻이겠죠. 그러니 정말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면접을 보고 나서 회사가 당신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 면접 과정 중에 당신에게 어떤 부족한 점을 보았기 때문일 거에요. 회사 입장에서는 그 아쉬운 점들은 아마 경력이 더 있었더라면 갖췄을 수 있을 만한 것이라 판단했을거구요. 그래서 대놓고 어떤 점들이 부족했는지 세세하게 설명하는 대신에 ‘죄송해요, 저희는 좀 더 경력을 가진 사람을 선호해요’ 라고 말해버린거겠죠. 그게 좀 더 예의있어 보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 제가 말하는 것은, ‘경험이 부족하다’라는 거절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거에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경험이 좀 더 있는 사람과 나를 비교했을 때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여긴걸까?’ 라고 역으로 질문을 해보세요. 그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당신이 개선할 수 있는 부분, 혹은 면접에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을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을거에요.”
그녀는 말을 잃은 눈빛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수첩에 무언가를 차분하게 적어내려갔다.
자존심 같은 것 버렸다고, 어디든 불러만 준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가서 일할 수 있다고. 절박한 마음을 ‘열정’ 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사회에 도전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상황이 우리를 더 고지식하고 폐쇄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불확실한 미래와 거절의 연속은 자신감을 꺾다 못해 내면을 자격지심으로 가득 채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자격지심이 현재의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세우는 데 핵심이 될 만한 우리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거다. 익숙한 방식 만을 반복하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적대심을 쌓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많이 본다.
내가 미국에서 관찰한 아시안 학생들은 이력서 뿌리기에 성실함을 다하는 것을 주요 취업 전략으로 삼는다. 내 앞에 있는 그녀 역시 자신이 얼마나 많은 회사에 지원을 했는지를 가장 먼저 나에게 어필하고자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미국 기업의 오픈 포지션들이 내부 추천을 통해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 살면서 공부하고 따라잡는 것 만으로도 벅찬 유학생이 어떻게 인맥까지 만들 수 있겠느냐며 단념을 해버리는 것이다.
자격지심이니, 세상을 원망한다느니, 고지식하다느니 따위의 묘사는 내가 꼰대여서도, 아시안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서도, 이미 처음부터 모든걸 완벽히 알고 취업을 해내서도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한 이후 취업 직전까지 그게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파트너 L이 나의 곁에서 충고를 해줄 때마다 그가 백인이고, 남자고, 나와 다른 직종을 가지고 있고, 언어 장벽의 버거움을 몰라서 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었었다. 잔소리로 여기고 흘려들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잔소리 조차도 일부 마음 속에 남아 때때로 공명하는 법. 내가 고수하던 그 방식, 수많은 커버레터와 이력서, 매일같이 다듬는 포트폴리오가 효력을 발휘하지 않자 뭐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그가 제안한 방식, 나답지 않은 것 같은 시도를 해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일하게 되었어요?”라고 물어왔을 때, 비로소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다 싶어 안심이 되었다.
테크분야의 일종인 사용자경험(User Experience, UX)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광고예술 석사 과정 중간 지점을 지났을 때야 피어났다. 많은 회사들은 UX는 비교적 새로운 분야이고 융합 주제니 비전공자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낙 UX 인재의 공급이 넘치는 지라 관련 경력이 있는 이들에게 먼저 눈을 돌리는게 현실이었다. 학기 중 인턴십 조차도 회사들이 ‘심리학 박사’나 ‘UX에 2년이상 경력을 둔 사람’을 선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에 나는 후배 ‘그녀’의 좌절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좌절할 시간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는 중에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희망하는 업종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졸업 후에도 똑같은 문제가 더 큰 압박으로 나의 발목을 잡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UX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지도 교수님을 설득해 UX를 다루는 타 전공 프로그램의 수업들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광고와 마케팅에 최적화되어있던 포트폴리오를 UX에 맞게 재가공, 업데이트 하였다. 포트폴리오를 다듬는 과정 중에 학교 교수님들, 업계에 있는 사람들, 친구들을 찾아가 리뷰를 요청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다행히 UX의 메카여서 현직 전문인들이나 학생들을 초대하는 프로페셔널 이벤트가 많았다. 엉성한 포트폴리오와 유치한 명함을 들고 그런 이벤트들을 기웃거렸다. 나의 작업물이 완성작이 아니라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었다. 나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담긴 작업물은 왠만한 추상적인 질문들(예: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디자이너가 되나요?) 보다 훨씬 농도 짙은 업계의 인사이트나 미처 알지 못했던 관점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 학기중에 하고 있었던 스타트업에서의 인턴십도 뻔뻔스럽게 UX로 재포지셔닝하였다. 원래는 회사 소셜미디어의 광고 진행 및 컨텐츠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일을 무사히 잘 마치고 신임을 얻어 인턴직 연장을 제안받았을 때 매니저에게 포지션을 UX와 더 연계가 되도록 확장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 회사에서의 1년간의 인턴십을 나의 첫 UX 경력으로 만들 수 있었다.
온갖 발버둥으로 조금 더 UX스러운 포트폴리오와 콘텐츠 전략가(Content Strategist, UX의 한 분야)라는 타이틀을 완성했을 즈음, 멘토가 되어준 강사 조가 나에게 묻지도 않고선 나를 회사에 추천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곳이 UX 전문인으로서 나의 정식 첫 직장이 되었다.
추천을 받았다 해서 낙하산처럼 회사에 취직한 것은 절대 아니다. 6개월에 걸쳐 전화 인터뷰, 면접, 면접 챌린지까지 다 거쳤다. 미국 기업들이 직업 공고를 인터넷에 올리기 전부터 내부 직원들에게 추천을 받고, 그렇게 받은 후보들을 더 선호하는 건 인맥을 중시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이 프로세스 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확률상 더 신뢰할 수 있는 후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위에 서술했던 일련의 노력들이 조가 나라는 후보를 회사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 조금 더 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의 추천 이유를 듣는 동료들의 입장에서 “성실하고 포트폴리오가 괜찮아서 추천할만한 학생후보야” 보다는 “지금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전략(UX의 일부 분야)를 하고 있는 친구인데, 디자인이랑 리서치도 굉장히 잘해.” 가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사회에 가치를 부여하는 정식 일원으로, 전문 직업인으로 자리잡는 여정은 어디에서든 고독하다. 더군다나 아시안으로서, 사회 경험이 없는 새내기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도전은 더욱 험난하다.
그렇기에 아마도 그녀는 나에게 공감과 위로를 기대했을 것이다. 대학원 교수님으로부터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국에서 온 여자애가 너처럼 전공과 다른 길을 택하고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원하는 곳에 직장을 구해서 잘 다니고 있다") 얼마나 반가워 했을지도 그녀의 이메일에서 느껴졌었다. 그래서 최대한 따끔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아시안이고, 어렸고,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나의 실패와 실수들, 그리고 그로 얻은 깨달음을 나눠주고 싶었다.
매체에 가끔 등장하던 “동양인 XXX 1호’의 타이틀을 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공을 ‘성실함’에 돌렸다. 인턴시절부터 제일 일찍 출근해 제일 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10년동안 거듭한 끝에 런던의 유명 디자인 에이전시의 수장이 되었다는 그 남자, 개인 사생활을 버리고 7일 24시간 오로지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한 끝에 뉴욕 최고의 플로리스트가 되었다는 그녀... 나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나 신문에서 보면서 ‘아시안이 세계의 무대에 설 수 있으려면 누구보다 성실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실패와 부족함은 내가 더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인줄 알았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도 인구 대비 아시안의 비율이 가장 높다. 그러나 그런 도시에 산다고 해서 아시안들이 마냥 자유롭게 정체성을 뽐내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윗세대에 비해서 훨씬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유물처럼 남아있는 아시안에 대한 편견, 초기 이민 세대가 그 당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성공의 공식, 그리고 우리 내면의 무의식까지 뿌리내린 고정관념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세계의 수많은 재능과 열정, 아이디어가 모여드는 곳이다.
아시안 특유의 조용함과 신중한 태도, 여기에 억양이 섞인 영어 구사의 조합은 타 문화권 사람들에게 자칫 ‘자신감 부족’으로 왜곡되어 보여지기 마련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아시안 국가 출신 학생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경험해왔다.
취업의 문턱을 넘어서도 고민은 계속 된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분명하고 또렷하게 너의 생각을 표현하니?"
얼마 전 입사한 일본인 디자이너 동료가 물었었다. 나에게는 그 질문이 꽤나 충격이었다. 분명하고 또렷하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회사 생활에서 가장 어려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에서 누구보다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하는 나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고백했다. 그의 말에 생각을 해보니 이 큰 회사에서 영어를 외국어로 쓰는 아시안 국가 출신 직원 중에 나처럼 미팅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이는 없었다.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입을 다물다가 어쩔 수 없을 때 비로소 한문장 한문장 신중하게 완성했다. 동료들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팀원들과 가까워지면서 매니저 뿐만 아니라 동료들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이런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은 꺼내봐야 맞는지 틀린지 아는거야. 너가 조금 덜 신중해주었으면 좋겠어. 너의 의견을 더 많이 듣고 싶어."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 동료도 있었다. "회사는 우리의 의견과 생각을 듣고 싶어서 우리한테 월급을 주는거라구. 너가 의견이나 질문을 꺼냄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할 거라는 우려는 절대 하지 마."
시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던 매니저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연습하는게 선그리기야. 처음에는 선 하나 그리는 데도 삐뚤빼뚤하고 구부정 하지. 자꾸 그어나가다보면 어느새 손에 익어서 곧고도 부드러운 선을 그리게 되지. 의사표현도 마찬가지야."
나만 열어보는 일기장 속에 성실하게 선긋기 연습을 하는 대신, 동료와의 안부 대화 위에서, 작은 미팅에서, 해피아워에서, 프레젠테이션에서, 팀 런치 중에 나의 선을 꺼내 그려보기 시작한건 그런 독촉 아닌 독촉 덕분이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깨달은 건 의사 표현이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나 어휘 구사력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의사 표현은 나의 자리와 모양을 알고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행위였다. 번드르한 어휘나 화려한 자격보다 더 중요한건 먼저 '나 여기 있어요.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걸 원해요.' 라고 소통하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이제 내가 그려내는 선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이제 나의 라인의 떨림을, 색을, 흐릿함을 낯설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샌프란시스코는 늘 조용하게 혁신을 꿈꾸며 끊임없이 자기를 깨부수는 아시안 여성들로 가득하다. 길 위에서 그녀를 닮은 누군가를 볼 때면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날 이후 대화 신청을 해온 그녀를 닮은 많은 아시안 여자 디자이너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지 상상해본다.
언제든 그들과 커피 한잔을 나누고 싶다.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억양이 가득찬 말투를, 그 속의 희망과 야심을 듣고 싶다.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