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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Sep 26. 2024

샌프란시스코에 코요테가 우는 밤엔

세계적 재난이 왔을 때 비로소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늘이 짙은 푸름으로 식어가는 저녘이었다. 엄마와 나는 거실의 통유리창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 쪽빛 그림자가 드리워진 뒷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집의 작은 뒷뜰은 무성하게 자란 풀과 중구난방으로 뻗은 선인장들 때문에 정글처럼 보였다.


나는 왠지 들뜬 마음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야생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초연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고공낙하하여 재빨리 들쥐를 물어가는 매, 옆집에서 획득한 땅콩을 열심히 묻어두는 다람쥐, 흑백의 털이 풍성하게 섞인 스컹크, 가족단위로 몰려다니는 너구리들, 그리고 집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 자주 등장하는 코요테까지. “원래 코요테는 캘리포니아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이긴 한데 도시에서 사람들 눈에 띈 적은 거의 없었어. 그런데 판데믹이 시작되고 시민들에게 자택 대기 명령이 내려지면서 사람들이 바깥에 나가질 않으니 코요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거야. 크기가 작은 늑대같다고나 할까. 무서우면서도 신비로워.”


열심히 코요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뒷뜰 저편 수풀 속에서 네발 달린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요테?" 라고 물었지만 보통 도로나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라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한건 네발의 검은 그림자의 형태로 저벅저벅 우리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짐승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이른 달의 고요한 빛이 그의 형체를 드러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코요테가 아니었다.


검은 털을 가진 재규어였다.


Dall.E


재규어는 그날 따라 유난히 푸르렀던 저녘의 어스름을 두 눈에 그대로 담은채 다가오고 있었다. 파란 눈은 우리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야수의 맹렬함에 대한 본능적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신비로운 자태에 매료되어서인지, 엄마와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한참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무섭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새 재규어는 우리가 앉아있던 통유리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순간 든 생각은 단 하나,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거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재규어를 향해 돌진했다.


재규어도 나를 향해 뛰어올랐다.


우리는 공중에서 만났고 재규어의 날카로운 앞발은 나의 팔을 새차게 할퀴었다.




그 꿈을 꾼 지 열두 밤 후, 의사는 전화를 걸어 말해주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2021년 새해 겨울의 일이다.




2.



L은 우리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기 훨씬 전 장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부터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나는 가족계획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기를 키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 대신에 이렇게 다짐했다.

"2020년, 그때 우리 엄마 아빠가 되자."


하필 2020년을 고른건 2010년대를 사는 당시에는 2020이라는 숫자가 먼 미래처럼 느껴져서였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책임질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구에게 뭘 가르쳐주고 성장을 돕겠는가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제대로 경험할 틈없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를 했다.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한국에서 그동안 이루고 행했던 모든 것들 (대학의 이름, 전공, 학점, 학점을 쌓는 틈틈이 해낸 대외활동)이 모두 읽을 수 없는 외국어 글자조각이 되고 말았다. 모든걸 처음부터 다시 쌓고 나라는 사람을 증명해야하는데 그걸 남의 언어로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날지경이었다. 내 자신부터가 한참 키우고 건사해야 할 애처럼 느껴졌다.


샌프란시스코 첫 직장에서


"우리, 애기는 언제 가질까?"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서 마음 속으로 품었던 진짜 대답은 이거였다.


"내가 어른 구실을 한다고 느낄 때.

'XX의 아내'가 아니라 '직업인 주원" 으로 불릴 수 있을 때.

'외국이민자 치고 일 잘하네' 가 아니라 

그저 '건실하고 유망한 실리콘밸리의 청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때엔 엄마가 될 용기를 가져볼 수 있을 것 같아."




3.



막상 2020년이 다가왔을 때, 나는 L에게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2020년 봄, 그때의 나는 승진을 거듭했던 안정적이었던 일터를 뒤로하고 이제 막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한 상태였다. 새로 도전하는 분야라 공부할 것도 많았고, 한참 고공성장중인 스타트업이라 일도 많았다. 게다가 나는 회사에서 UX리서처 2호로서 회사에 팀의 가치를 증명해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사실 그 모든건 예측하고 준비했던 사실이었다. 더욱 성장하고 싶은 욕심에 나를 새로운 도전에 밀어넣었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일간지 해외면의 이색토픽으로만 등장하고 곧 사라질줄 알았던 바이러스, 코로나의 확산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상륙으로 도시 전역에 자택 대기 명령이 내려진 상황, 마침내 공짜점심을 주는 회사로 이직했다고 좋아했던 게 무색하게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것마저 두려워 매번 끼니를 고민하는 상황, 회사 노트북을 택배로 받아 하루종일 집에 갇혀 노트북 앞에서만 앉아있는 상황 역시 예측하지 못했다. 마침 우리의 스타트업은 판데믹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기가 막히게 적합한 서비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책임감 내지 사명감 마저 갖고 있었다. 누구 하나 군소리 없이 야근을 했고, 슬랙 메시지는 24시간 쉴틈이 없이 이어졌다.


도시 봉쇄는 생각보다 오래 갔다. 집안 곳곳에 침투한 우리들의 새 '사무실'은 가뜩이나 작은 집을 더 좁아보이게 만들었다. 원격근무는 빠르게 우리 생활에 자리잡았고, 오피스 빌딩이 몰려있는 다운타운은 고스트타운이 되었다. 자연스레 버스와 지하철을 탈 일은 줄어든데다가, 우버를 타는 일 마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가용을 타고 어디 멀리 가보려 해도 공중화장실을 쓰는 일이 무서워 포기하곤 했다.



Mount Sutro에서. 그리고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샌프란시스코.


L과 내가 도시를 하염없이 걸어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우리는 일을 하지 않을 때마다 밖으로 나가 몇시간 동안 걸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사실 '도시'라고 불리기에는 소박하게 느껴지는 동네들이 훨씬 많다. 항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동쪽의 다운타운과 차이나타운의 구시가지, 그리고 마약과 홈리스 문제로 악명높은 텐더로인 지역을 제외하면 도시 대부분은 5층 이하의 앉은뱅이 주택과 공원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는 다행히 그런 앉은뱅이 동네들 사이에 살고 있었다. 걸어다니고 보니 우리 곁에는 공원이 참 많았다. 두보스 파크(Duboce Park)에서 아름다운 빅토리안 양식의 주택에 둘러쌓여 앉아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을 구경했고, 높이 솟은 수트로 타워 (Sutro Tower) 옆에 숨어있는 수트로 산(Mount Sturo)에서 등산 다운 등산도 했다. 글렌 캐년(Glyen Canyon)은 말 그대로 협곡에 난 숲길이었는데 협곡 위를 뱅뱅 돌며 먹이감을 찾는 독수리와 매들이 장관을 연출했다. 날씨가 유난히 좋은 날은 아예 마음 먹고 태평양이 훤히 보이는 오션비치까지 왕복 3시간을 다녀오기도 했다. 골든게이트파크는 공원 내 가장 큰 자동차 대로였던 JFK를 차단하여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산책로를 제공했고, 페이지 스트리트(Page Street)나 레이크 스트리트(Lake Street)같은 평범한 도로들도 '슬로우 스트리트(Slow Street)'라는 새로운 이름의 산책로로 변신하여 우리를 비롯한 도시 뚜벅이들을 위로했다.


돌로레스파크. 사회적거리두기가 한참 진행되던 때 도시는 피크닉하는 사람들을 위해 잔디에 원을 그려넣었다. 


산책로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화장기없이 부스스한 머리로 잠옷인지, 운동복인지, 업무복장인지 모호한 그런 옷을 입고 꿈을 꾸듯이 걷고 있었다. 도시 자택 대기 명령 아래서 산책을 나온 우리 모두는 재활센터의 환자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도시는, 우리 사회는, 인류는, 일종의 재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겁에 질려있었다. 한 편의 집단 악몽 속에 살고 있었다. 소중한 것들을 잃었고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차가 사라진 도시에서는 도시의 푸르름과 사람들의 느린 발걸음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햇볕을 쬐는 노인들의 따뜻함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후 다섯시마다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국자로 냄비를 두들겨 징소리를 내며 환호를 했다. 오늘 하루를 건강하게 버텨낸 우리를, 그리고 감염의 위험을 무릎쓰고 일터를 지키다가 퇴근하고 있을 길거리의 그 누군가를 위하여.



숲속에 숨어있던 코요테들이 도시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야 말로 분명한 재활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4.



코요테들은 밤마다 진하게 울었다.

L의 질문을 곱씹으며 잠을 설치던 그날 밤에도 코요테 무리는 구슬픈 합창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저녘을 대충 때우고 잠옷차림으로 야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침실로 향하던 L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너 혹시, 2020년에 걸었던 약속을 기억해?"

2020년을 절반이나 넘기고서야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그의 얼굴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그제서야 나는 마법에 풀린 사람처럼 우리의 약속을 기억해냈다.




5.



약속을 기억하느냐는 L의 질문은 슬랙 메시지의 알람소리와, 미팅노트와,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와, 팀원들의 얼굴로 채워진 줌의 격자 위에 한참동안 갇혀 있던 나를 순식간에 끌어내었다. 지난 10년간 인생 중심에 두었던 ‘커리어’라고 불렀던 모든 것들이 프리런치, 섹시한 오피스 가구, 힙한 컴퍼니 아우팅의 허물을 벗고선 작은 노트북 화면 안에 갇혀있었다. 나 또한 덩달아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먹고살 궁리에만 빠져서 샌프란시스코 곳곳을 들여다보지도 않은채 샌프란시스코는 작고 더럽고 지루하다고 불평했던 것처럼, 다운타운을 샌프란시스코의 전부로 치부했던 것처럼, 나 역시 커리어가 인생의 전부인냥 과몰입하진 않았던가. 커리어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인냥 인생을 바라보진 않았던가. 파트너와 나누었던 중요한 약속과 다짐들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판데믹 이래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뚜벅뚜벅 걸어다니면서 나는 샌프란시스코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공원이 얼마나 많은지, 홍학과 매와 코요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동안 몰랐던 동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샌프란시스코 특유의 온화한 날씨가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발견하고 깨달으며 전율했다. 나는 내 안에, 그리고 인간으로서 영위할 수 있는 인생 여정 속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공원’과, ‘이웃’과, ‘고즈넉한 동네’와, ‘희한한 동물과 식물들‘을 만나고 싶었다. 집에서 요리를 더 하게 되니 캘리포니아의 제철과일이 무엇인지 알게되었고, 공원을 더 많이 방문하니 계절이 없는줄 알았던 샌프란시스코에도 철마다 피는 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렴풋이나마 나의 인생에도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 계절에 어울리게 변화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엄마라는 역할을 내 삶에 들인다고 해서 커리어를 놓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엄마라는 역할을 겸하면서 커리어도 건강하게 꾸리기 위기 위해서는 커리어와 새롭게 관계를 정립해야했다.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고, 기가 막히게도 2주 후 회사는 집단 정리해고를 시작했다. 



6.



태몽을 기대하기는 커녕 의식 속에서 잊고 지냈었다. 태몽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도 태몽을 꾸고 나서 인터넷을 뒤져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내가 태몽을 꾸었다는 사실보다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던 재규어 라는 동물이 나를 공격하는 꽤나 폭력적인 서사가 태몽인 것이 훨씬 의아했다. 얼핏 듣기로 태몽이란 냇가에서 통통한 금붕어를 잡아 올리거나, 탐스런 복숭아를 나무에서 톡 따거나, 뽀얀 토끼가 품에 안기는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라고 들었다. 임신의 경험도 그런 아름다운 태몽같은 것이라고 들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뜨개질을 하다가 딸기를 먹고, 태교를 위해 클래식 음악을 듣고, 뱃속의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고, 남편과 팔짱을 끼며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거라고.


그러나 실제 임신은, 적어도 나의 임신은 재규어의 날카로움과 야생성을 훨씬 더 닮아 있었다. 구역질을 하는 사이사이에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고, 둘이서만 살던 공간에 아이를 들이기 위해 이곳저곳 청소와 수리를 하느라 무거운 박스를 한참 들어 나르고 다녔다. 호르몬으로 인한 감정 기복 때문에 작은 일에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거나 파트너에게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의 고함을 질렀다. 금방 화가 났고 화를 참지 않았다. 튼살크림을 열심히 발랐지만 배는 사방으로 하얗게 텄고 그 흉터가 꼭 재규어의 할큄 같았다. 첫 임신은 예정일보다 늦게 출산을 하는게 일반적이라고 들었지만 나의 ‘미니’ 재규어는 예정일 10일 전에 스스로 양수를 터뜨리는 바람에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우리는 아기를 낳자마자 이사를 준비했다. 아이는 이사박스에 둘러쌓여 첫달을 보냈다.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나는 임신과 엄마됨을 둘러싼 미디어의 이미지가 얼마나 개똥같은지를 깨달았다. 세상은 ‘복숭아’ 같은 아기를 지키기엔 너무 험한 곳이었고, 하나의 생명을 한 생명 안에 만들어 내는 생식 매커니즘은 아름답지만 파괴적인 일이었다. 마치 꿈 속에서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던 재규어를 경외감으로 쳐다보았던 것처럼, 임신으로 일어나는 내면과 외면의 변화를 공포와 흥분 속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정말 엄마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아직도 너무 부족한 사람인건 아닐까 회의가 들 땐 내 뱃속의 아이가 ‘재규어’임을 기억해냈다. 내가 잠시 나약할지언정 나의 아이는 꿋꿋하게 버티며 성장하고 있을거라고. 아이와 나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며 함께 배워나갈거라고.


도시에 코요테가 찾아왔던 것처럼 나에게는 재규어가 찾아온거라고.

도시가 산책로를 확대하며 느린걸음을 배웠던 것처럼 

나 또한 인생의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며 더 풍부한 인생을 살 수 있을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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