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단독주택 집주인이 되다
노부부가 지난 30년 세월을 보낸 빅토리안 건축 양식의 주택은 그들 얼굴 위 주름진 피부처럼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으나 그들의 인자한 미소 만큼이나 포근했다. 그 집은 100년 전에는 샌프란시스코를 뒤흔든 지진을 이겨내었고, 약 50년 전에 저 멀리 골든게이트파크의 우거진 나무들과 노란 석양을 흠뻑 담아내고 싶었던 주인의 바램으로 세워진 선룸도 있었다. 뒷마당에는 태평양의 안개바람을 받으며 서있는 야자수 가족이 서있었고, 지하실에는 노부부가 30년 전 이사오기 전부터 걸려있었다는 미스터리한 가죽자켓도 있었다. 우리가 집열쇠를 넘겨 받던 날, 할머니는 그 자켓을 이 집의 수호신이라 부르며 그대로 두고 떠났다. 역사가 길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 '자켓 수호신' 때문인지, 집을 돌아보는 동안 이곳이 마치 생명이 깃든 하나의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굳어버린 습관과 유별난 고집, 사소한 취향과 나름의 자부심을 가진 그런 존재 말이다.
처음 이 집을 만난 것은 오픈하우스 투어를 통해서였다.
"6월 14일-15일 토-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미국에서 이제 막 부동산 시장에 나온 주택 매물이 늘 그렇듯, 이 집 또한 온라인 부동산 플랫폼에 짤막한 오픈하우스 공지를 올려놓았었다. 오픈하우스가 열리는 시간에는 집이 대중에게 공개된다.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누구든 방문해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집은 콜밸리(Cole Valley)라는 동네에 있었다. 콜밸리는 역사가 오래된 동네 중 하나라 샌프란시스코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알록달록한 빅토리안 하우스들과 커다란 가로수로 가득찬 곳이었다. 게다가 골든게이트 파크에서 가깝고 빈티지샵과 커피숍이 많아 늘 젊은이들 북적였다. 명성에 비해 동네의 크기가 작아 집이 매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기에 그곳에 산다는 것은 이뤄지지 않을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플랫폼을 통해 과거 거래 내역과 사진, 건물 구조도 까지 확인을 하고 난 뒤였지만, 소개팅을 나가는 길처럼 괜히 떨리고 설렜다. 집도 데이트 상대와 비슷해서 프로필에 탈모를 모자로 감춘 것처럼 사진에 교묘하게 약점을 숨겨놓았을 수도, 만나자마자 기분이 쎄해지는 에너지를 풍길 수도, 아니면 인기가 많아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집주인 부부는 집과 동네를 정말 사랑하세요. 연세 때문에 주택을 돌보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쳐서 콘도(한국으로 치면 아파트)로 이사하는걸 고려중이세요. 그런데 정말로 집을 팔고 싶은지는 아직 잘 모르시겠다고..."
집 안으로 들어선 우리를 맞이한 부동산 에이전트가 황급히 해준 말이었다. 아마도 우리의 당황한 표정을 금방 읽어서 그랬을 거다. 집 안에는 부부의 가구와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었다.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오픈하우스'는 거래의 첫 관문이자 가장 중요한 '마케팅' 전략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경우 셀러(판매자)가 미리 이사를 나와 집을 깨끗하게 비우고, 부동산 에이전트와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내부를 스테이징(Staging) 한다. 신축 아파트의 모델하우스처럼 공간을 잘 활용하면서도 시각적 매력을 극대화 시키는 가구와 액세서리를 들여 집을 변신시킨다.
노부부의 취향은 남달랐다. 응접실과 거실의 벽과 천장은 대리석의 무늬를 흉내낸 벽화스타일의 페인팅으로 덮여 있었다. 게스트 베드룸과 연결된 선룸에는 바둑판 무늬의 대리석 타일 바닥이 초록빛 바깥 풍경과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거실에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는 곡선형 흰색 가죽 쇼파가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고, 쇼파에 앉으면 맞은편에 커다란 붉은 추상화가 보였다. 쇼파 뒤에는 권위가 느껴지는 무거운 책상과 검은 사무실 의자, 그리고 수북한 서류더미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바로 이 곳에서 딸과 함께 로펌을 운영하셨다고 했다. 전문적인 오픈하우스 스테이징의 목표는 잠재적 구매자들이 집을 둘러보면서 이곳에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사를 오고 싶게 만들 만큼. 그러나 노부부의 독특한 취향과 삶의 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집에서 잠재적 구매자인 나는 파트너와 이곳에 사는 나의 모습이 아닌 노부부의 지난 30년의 삶을 상상하고 있었다.
나의 파트너가 그 할아버지처럼 서류더미에 둘러쌓인 변호사여서인지, 노부부가 가끔 찾아오는 손주를 위해 준비해놓았을 다락의 한구석 작은 목마를 보며 뱃속의 아이를 떠올려서인지, 아니면 집을 떠나는 길에 쌍둥이 마티즈 두마리를 끌고 산책길에서 돌아오던 할머니의 건강한 미소를 보아서 인지는 모르겠다. 노부부의 지난 삶을 상상하는 동안 작은 목소리가 내 안에서 피어올랐다.
'이 집에서, 그들처럼, 함께 나이들어가고 싶다.'
노부부가 집을 전문적으로 스테이징 하지 않은게 이사 갈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였다는 부동산 에이전트의 말에 반신반의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스테이징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들이 모르는 어떤 심리전략을 써서 판매가격을 높이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계약을 진행하면서 그 말에 거짓이 없었음이 분명해졌다. 할아버지는 이메일로 이렇게 써보냈다. "지난 30년의 삶을 정리하려고 하니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드네요. 집 계약을 맺은 뒤에 이 곳에서 두 달만 저희가 월세로 지내며 서서히 집정리를 해도 괜찮을까요?" 메일 아래 서명란에는 아직도 그의 로펌 이름과 이 집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노부부는 한창 살림을 정리하던 중 나를 초대했다. 자신들이 쓰던 가구나 장식품 중 혹시 우리가 사들이고 싶은 게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이유였다. 그분들께 죄송한 말이지만 오픈하우스 투어를 둘러보면서 마음에 들었던 가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초대에 응하는 것을 망설였다. "정말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가서 인사 드려봐. 예의상 작은 거 한두개 골라서 사고." 계약을 위해 먼저 노부부를 만났던 L이 평소 냉소적인 그답지 않게 잔뜩 흥분해서 나를 설득했다.
노년의 삶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집의 모습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10년 전 쯤 잃어버렸다가 이제서야 빛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먼지 투성이의 양말 한짝, 할아버지의 필기체가 가득 적힌 종이들, 먹다 남은 샌드위치, 식탁 위의 빨래더미가 그 때 집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재즈 음악만큼 어지럽게 공간에 늘어져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긴장섞인 미소로 답하며 빠르게 집안을 스캔했다. '그나마' 사들일 의향이 있을 가구나 장식품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부지런하게 손을 움직여 물건들을 치우면서 말했다. "여기 보이는 왠만한 가구들은 이미 다 임자가 정해진 상태에요. 이제 더 처분해야 할 거는 없고요. 내가 초대한 이유는 여기 이 붉은 그림이 이 집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선물로 주고 싶어서 두고 가도 되겠는지 묻고 싶어서였어요. 어때요?" 거실의 하얀 가죽쇼파가 응시하고 있던 그 커다란 붉은 초상화였다. "아 네 좋아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노부부에게 과거를 고백하고 있었다. L과 뉴욕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 샌프란시스코에 온 이유,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를 털어놓았다. L이 왜 그들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 할머니에게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었다. 차분하고 고상한 동시에 개방적이고 친근했다. 그 세대 대부분의 미국 어른들과 달리 나에게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한국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는 괜히 한국이나 동아시아 국가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지식이나 지인을 언급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한국에 못가본 것이 아직도 후회된다고 고백했다. 할머니는 자신을 은퇴한 교장선생이라고 설명했다. 불교 신자이고, 다니는 절의 불교 교리가 한국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걸로 안다고 하셨다. 불교신자였던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분에게 괜한 친근감을 느꼈던 것일까.
우리는 서서 20여분 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이 키우는 쌍둥이 마티즈 두마리가 지루해졌는지 발 주위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벌써 강아지들 산책 시켜줄 시간이 다 되었다며 나를 자연스레 문으로 안내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저희는 이 동네에 친구들이 많아요. 30년 전에 이사왔을 때부터 여기 있었던 이웃들과 아이를 키우고, 서로의 경조사를 축하하고, 여행을 하며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었죠. 그래서 더 이 집을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이웃들도 마찬가지로 슬퍼하고 있고요. 이 집의 새 주인들이 누구일까 엄청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대화로 보건대 L과 당신은 이웃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거에요! 제가 소문을 잘 내놓을게요" 할머니는 짖궂은 윙크를 보내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는 참에 할머니가 거리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짐! 지나! 릭키! 리사! 토마스! 이리로 와봐!"
마치 덤불 속에 숨어서 할머니의 소환을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듯 이웃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나는 대여섯명의 미래 이웃들에 둘러쌓여 그들의 환대 앞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는 출산예정일보다 10일 먼저 태어났다. 산통이 시작된건 건 잠깐 새 집에 들러 새로 칠할 페인트 샘플들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응접실의 벽과 천장을 채웠던 그 대리석 무늬 벽화를 짙은 초록색으로 덮을 예정이었다. 페인트공이 벽에 살짝살짝 칠해놓은 여섯개의 초록 빛깔 사이에서 생전 처음 느끼는 진통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양수가 흘러나왔다. 첫아이가 출산예정일 훨씬 전에 양수를 터뜨리며 태어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Cada niño nace con su pan debajo del brazo.”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빵을 겨드랑이에 끼고 태어난다)
아이가 태어날 때 가정에 새로운 복이나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스페인어 격언이 생각났다. 이 빅토리안 하우스야 말로 나의 아이가 들고 온 '빵', 아이 자신이 직접 고른 터전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빅토리안 하우스로 이사를 한 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지 1개월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우리는 아이의 부모로서나 빅토리안 하우스의 주인으로서나 여러모로 서툴렀다. 아이와 빅토리안 하우스는 나이차이는 100년 이상이 날 지언정 공통점이 많았다. 둘다 예측 불허였다. 우리의 의지와 통제대로 움직여 줄거라 믿은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들만의 존재 방식과 리듬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들여야 했다. 문 손잡이는 저마다 달라서 어느것은 왼쪽으로, 또 어느것은 오른쪽으로 돌려야 했으며 그마저 제대로 꽉 닫히지 않는 문도 많았다. 차고에 다락까지 딸린 제법 큰 규모의 단독주택이지만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아서 평범한 삼성 냉장고 하나를 들이는데 입구 일부를 뜯어버려야 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각각 따로 나오는 화장실 싱크대를 왜 집을 사기 전에는 알아차지 못했을까 싶었다. 노부부조차 사용하지 않았다는 벽난로는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천둥같은 소리를 내었다.
낮잠을 자는 아이가 가장 사랑스럽듯, 빅토리안 하우스도 한참을 고치고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나서 바닥에 주저 앉아 커피 한잔을 들고 넋놓고 있을 때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왔다.
빅토리안 하우스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재임하던 기간(1837-1901)에 성행하던 건축 양식이라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작고 경사가 많은 샌프란시스코 땅에 지어진 빅토리안 하우스들은 영국이나 다른 지역에서보다 훨씬 좁은 폭의 형태로 지어진 데다가 늘 지진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건축의 견고함을 높이기 위하여 집들끼리 틈새를 거의 두지 않고 나란히 붙여 지어졌다. 집의 중앙부는 그런 이유로 창문이 없거나 직접광을 받지 못해 어둡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층고를 높게하고 그 높은 층고까지 쭉 뻗은 높고 넓은 창문(Bay Windows)이 붙여졌다. 커다란 창문은 의도대로 햇볕을 많이 들이지만 그만큼 추운 공기도 많이 들인다. 100년 전에 달린 그 창문은 아직까지도 이 집에 남아있다. 에너지 효율성이 제로다.
집안 공기가 유난히 찬 아침엔 동향으로 난 응접실 창가에 앉아 햇살 아래 몸을 녹이며 아이와 거리를 내다보았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많은 이웃들의 얼굴과 그들의 아침 루틴을 익혔다.
창문으로 보이는 우리를 향해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어주는 앞집 할아버지 릭키는 이 블록의 비공식 시장(mayor)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릭키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별명에 걸맞게 만날때마다 세심하게 안부를 물었다. 차고 문을 깜빡하고 닫아 놓지 않았을 때는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노부부의 정원사 역할을 해주었다는 세 집 건너 이웃 짐은 제임스를 길 위에서 만날 때마다 그의 작은 발을 잡고 흔드는 것을 좋아했다. 짐은 언젠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 노부부는 이 블록에서 소문난 소셜버터플라이(Social Butterfly, 사교적이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어. 집에서 주기적으로 파티나 명상모임을 개최하셨지. 그 분들이 떠난다고 했을 때 많은 이웃들이 슬퍼했던건 이 블록의 중력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였을거야." 바로 옆집의 켄조와 지나 부부는 우리가 이사오던 날 자신들의 연락처가 적힌 환영메시지와 함께 뒷마당에서 땄다는 감을 한접시 선물했다. 부부의 고등학생 딸은 가끔 집에 놀러와 베이비시터 역할을 해준다.
어느 아침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가려던 참에 건너편에 조안나가 보였다. 우리는 길을 건너지 않은 채로 거리에 주차된 차들 너머 소리 치듯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치고 움직이려는데 지나가던 젋은 남자가 감탄에 찬 소리로 말했다. "이웃들끼리 이렇게 다정한 동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목격하게 될줄은 몰랐어요!" 낭만에 젖은듯한 그의 표정에 머쓱해졌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키울 새 터전을 찾으면서 조금 더 가족친화적인 동네로 이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햇살과 추위는 물론 바깥의 소음까지 다 내부로 들이는 창문, 끈끈하게 나란히 붙어있는 집의 외벽, 그런 빅토리아 하우스의 특징들을 그 집 안에서 숨쉬고 성장하고 나이들어가는 우리가 닮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귀기울이고, 마음을 내보이고, 의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