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힘들 때 나는 우리 동네로 여행을 떠난다
작가 줄리아 카메론의 창작자를 위한 에세이 <아티스트 웨이The Artist's Way>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조언은 '아티스트 데이트Artist Date'라는 리추얼이다. 저자는 창작하는 시간 만큼이나 영혼을 채우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휴식을 더 취하거나 여행을 떠나라고 막연하게 충고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 속 아티스트를 데리고 데이트를 떠나라고 제안한다. 어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연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듯, 나의 '아티스트 자아'가 설레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찾아 나서라는 것이다.
나와 나의 아티스트 자아의 아티스트 데이트는 주로 나의 사랑하는 동네 콜밸리와 근방에서 이루어졌다. 연인과 매번 미셸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없듯이, 아티스트 데이트 역시 거창하거나 대단히 의미있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소박할수록, 가까울수록 나의 아티스트 자아는 더 흡족해했다. 그저 집 밖에 나와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늘 거기 서 있는 그 작은 상점에 들어갔을 뿐인데, 그제서야 제대로 들숨을 마시는 기분이 든다고 말해주었다. 글쓸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던건,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도 한줄도 쓰지 못했던건, 한쪽 어깨 위에 앉아 지겹도록 속삭이는 그 빨간 녀석의 말과 달리 너의 글쓰기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을 뿐이었다고.
우리의 아티스트 데이트는 처음에는 지극히 수줍고 사적이었다. 그게 맞는 방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아티스트 자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사교적이었다. 어느 곳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을 초대했고, 또 때로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했다. 아티스트 데이트로 시작하지 않았던 일상의 리추얼이 데이트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즐겨 찾는 데이트 장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곳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를 유난히 닮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라서, 콜밸리라서 존재할 수 있는 장소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가 우리에게 창조적 영감과 용기를 주고 있어. 언제든 그 사실을 잊지 말자.' 나의 아티스트 자아가 속삭였다.
그 서점은 아이가 마실 우유가 떨어졌을 때 얼른 다녀오는 구멍가게, 현금을 뽑으러 추리닝 바람으로 가곤 하는 은행 ATM 과 거리를 공유한다.
인도를 향해 널찍하게 열려있는 입구에 들어서면 책들이 눈앞에 쏟아진다. 누군가의 노고와 상상력과 용기가 예쁜 표지와 명쾌한 제목을 달고 방문자를 반긴다. 나는 가장 먼저 책들을 손으로 휙 쓸어본다. 마치 그 손짓에 텅 비어있는 내 영혼이 채워질 수 있기라도 하듯.
대형서점부터 다양한 컨셉을 갖춘 독립서점 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서울과 달리 샌프란시스코에는 서점이 몇 없다. 프랜차이즈를 좋아하지 않는 정치적 성향에 비싼 땅값이 더해져 한국의 영풍문고나 미국의 반즈앤노블즈와 같은 규모의 대형서점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샌프란시스코에서 걸어서 5분 안에 서점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서점은 몇 없을 지언정 책은 어느 시절보다 접근성이 좋아졌다. 이북(ebook)리더기는 물론 휴대폰으로 언제든 책을 열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밀리의 서재와 리디북스, 공공 도서관 앱 과 같은 플랫폼 덕분에 저렴한 금액 혹은 무료로 한국과 미국의 수많은 책을 접한다. 서점 브랜드 웹사이트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분야별 세분화하여 보여주며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한 이들을 친절하게 안내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서점에 들어서야 비로소 책과 진짜 조우를 한다.
책 한권을 집어들 때 그곳에는 책의 별점도, 리뷰 수도, 상세 카테고리도, 판매 랭킹도 없다. 대신 책의 무게와, 종이의 질감과, 그 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웃 책들과 나무 선반이 있다. 손으로 정성스럽게 휘갈겨쓴 서점 스태프의 추천평이 있다. 추천평을 읽고 있는동안 뒤에서 스태프가 단골손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를 대입해 낭랑하게 추천평을 읽어본다.
책구경이나하자 라는 마음으로 들어가지만 결국엔 어김없이 책 한권을 쥐어들고 나온다. 바로 옆에 복도와 화장실을 공유하는 칵테일바 탓을 해본다. 오후 두시부터 구리 머그잔에 크래프트 칵테일을 파는 힙스터들의 칵테일 바. 그곳에서 너는 서슴없이, 분위기에 취해, 단 30분을 위해, 한 잔을 시켜먹지 않는가. 같은 가격으로 일주일이, 한달이, 아니 평생이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어찌 돈셈을 하고 있느냐. 하고 책 뒤에 붙은 가격표가 나를 혼내듯이 쳐다보고 있다.
책 한권을 가슴팍에 묻고 걷고 있자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에 뒤를 돌아 서점을 바라본다. 서점 간판 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깨져야할 침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And there are so many silences to be broken.) - Audre Lorde
두려움에, 피곤함에, 자괴감에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마음 속 문장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침묵이 시끄럽게 웅웅대기 시작했다. 침묵의 아우성이 내 귀를 채우고 심장을 마구 두들겼다.
바람이 세차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일찍 깼다. 아침 9시,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특별한 계획 없이, 바람에 멀리 실려가는 낙옆처럼.
카페 플라이휠은 골든게이트파크 맞은편에 있다. 공원 산책을 가는 길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들기에도 좋고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나서 시원한 라떼를 마시기에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 카페 중에서도 흔치 않게 오랫동안 혼자 앉아있어도 눈치 안받을 수 있을만한 넓직한 공간이 매력적이다.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오기로 결정했던 그 여름, 자축하고 싶었던 마음에 혼자 만삭인 배를 품고 구석에 앉아 오랫동안 책을 읽었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 했고 부른 배를 접시삼아 가루가 잔뜩 날리는 크로아상을 열심히 먹었다. 지금도 손꼽는 가장 완벽한 오후 중 하나다.
오늘 아침도 이 카페에서 귀리유를 넣은 카푸치노에 크로아상을 먹으며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계획 없는 하루의 유일한 계획이었다. 주문을 하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카페 입구 근처에 앉아있던 홈리스(Homeless, 부랑자를 미국에서 일컫는 표현) 할머니가 내 뒤에 줄을 섰다. 주변 사람들의 예의바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화장실 문 코드를 물어볼 생각인가보군.' 나는 할머니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주문을 하려고 하는 순간, 할머니가 코트 주머니에서 오렌지색 알약병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가 나오는 것도. 할머니는 1달러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나처럼 커피 한잔을 즐기러 온 이를 다른 시선으로 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주문을 하면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뭐 드시겠어요? 제가 같이 계산할게요.“
“과테말라산 미디엄 로스트 푸어오버요. 블루베리 머핀도 추가할게요.”
어쩜, 취향도 세련되었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옆자리에 있던 어느 중년의 남성이 말을 걸었다.
“정말 친절하네요. 멋진 일을 하셨어요.”
이미 카페 주인의 감사의 미소에 잔뜩 멋쩍어 있던지라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아…. 아녜요. 생일이라서 작게나마 좋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라고 불쑥 말해버렸는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커피 한 잔 대접하는 그 작은 제스쳐를 아무 특별하지 않은 날에 했다면, 더 자주 했다면.
중년의 아저씨는 부드럽게 말했다. “오, 생일 축하해요.”
아저씨는 할머니가 이 곳의 단골이라고 설명해주셨다.
단골을 알아본다는 뜻은 아저씨 역시 단골이란 소리다. 아저씨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커피샵을 떠나는 많은 손님들이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씨유 어라운드.” 그는 가끔 바리스타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아저씨 덕분에 카페는 금새 온화하고 다정한 커뮤니티처럼 느껴졌다. 나도 왠지 이곳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을 포토그래퍼 라고 소개했다. 정치 저널리즘 사진작가로 일해왔고, 지금은 대마초의 합법화 및 대중교육을 돕는 사회운동가로도 활동 중이란다. 샌프란시스코 소셜클럽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대마초에 대해 평소에 많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와 자연스럽게 한참 의견을 주고받았다. 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처럼 대마초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대마초의 부정적 인식은 대마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용하는 현상에서 비롯되는거라고, 대마초의 오락적 사용의 사회문제는 결국 정치 움직임에 뿌리를 둔다고. 사실 주제가 대마초든, 테니스든, 방탈출게임이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무언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과 조금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대화 속에서 너그럽게 나눠주는 열정과, 반짝임과, 선한 마음이 참 고맙다.
“저도 저보다 더 큰 무엇에 대해 선한 마음을 품고 저의 열정과, 창의력과, 기술을 쏟아내는 사람이 되길 희망해요. 그렇게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요. 사회에 속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요.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뒤쫓는 삶 말고요. 그 ‘큰 무엇’을 찾으신 것 같아 부럽네요.“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무렵, 나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마치 마음 속 숨어있던 어떤 존재가 내가 조금 릴렉스 해진 틈을 타서 불쑥 고백을 뱉어버린 것만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굴러들어온 이 카페에서, 낯선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의 가면을 쓴 나의 인생은, 젠틀하게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계획의 틀을 벗어났을 때 너는 선의의 마음을 베풀 만한 아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의 열정을 즐겁게 들어주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그 마음을 양분삼아 나의 계획을 뿌리처럼 단단하게 뻗어나가 보라는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이의 월요병을 치유해준 곳이 있다. 주말 내내 함께 했던 아빠가 출근을 한다는 소식에 시무룩한 아이에게 말한다. "아빠는 회사가고, 우리는 '뮤직 클래스' 가는거야. 뮤직 클래스!" 내가 힘주어 말하자 아이의 표정이 금새 밝아진다. "헬로 쏘옹(Hello Song)?" 아이가 묻는다.
아침을 먹고나서 유모차 없이 나란히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집에서 세블록 건너, 작은 성당 뒷편 강당에 우리의 음악 교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는 흥얼거리며 음악 선생님 "티처 코리(Teacher Corey)"와 그의 기타가 기다리고 있을 그 곳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성당에서 수업이 진행된다고 하여 종교적 색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은 장소만 가능하다면 샌프란시스코 곳곳 어디든 진행된다. 공원 잔디밭 위에서 열리는 수업도 있다. '뮤직 투게더'은 하나의 성공적인 프랜차이즈가 되어서 미국 전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도 전파되었다. 문화센터 같이 영유아들을 위한 수업이나 활동이 많지 않은 미국 육아 무대에서 한줄기 단비다.
대중적인 음악교육 프로그램이 되었지만 이 수업을 샌프란시스코 답게,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 공간을 빌려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 티처 코리다. 수업은 수업이라기보다는 티처 코리의 콘서트 현장같다. 뽀글머리에 뿔테 안경, 형형색색의 옷에 네온 색깔의 양말을 신고서는 기타를 껴안은채 강당 바닥 카페트 위에 앉아 이제 막 도착한 아이에게 "왔썹 쩨이(What's up J)"라고 외치는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히피의 동네 해이트 애시버리가 낳은 인디 뮤지션이다. 티처 코리는 유쾌하지만 우스꽝스럽지 않고, 수다스럽지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음악 중간 중간 쏟아내는 속사포같은 그의 스피치는 음치 엄마도,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둥그렇게 둘러앉아 잔뜩 얼어붙은 아이도 금방 긴장을 풀 수 있게 도와준다.
긴장한 음치 엄마, 그게 나였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한시간동안 같이 노래를 부르는 수업은 나에게는 고문처럼 들렸다 (소규모라 립싱크도 못한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 사랑스러운 조카에게 동요 한 곡 불러주길 거부했었다. 하도 좋다는 소문에 호기심으로 갔던 1일 클래스에서 오랫동안 걷는 시도 조차 하지 않았던 아이가 수업 중 갑자기 벌떡 일어나 티처 코리와 처음보는 아이와 어른들 앞에서 첫 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것이 내 운명임을 직감했을 뿐이었다.
아이는 극적으로 수업에 관심을 보였지만 막상 정기 등록을 하고나서는 수업 내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내 무릎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저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율동을 하는 티처 코리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아주 비싼 실수를 한건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코리가 강당에 앉은 우리 여덟명의 보호자들을 향해 말했다.
"수업 내내 무반응처럼 보인다고 걱정하시지 않아도 되어요. 한참 게임에 열중 중인 게이머의 얼굴을 보신적이 있나요? 늘 웃고 있지 않지요. 오히려 정색하는 것 같고 때로는 화가난 것처럼 보여요. 아이는 반응이 없는게 아니라 얼굴에 표정을 짓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강렬하게 몰두 중일 수 있답니다."
다음 수업에서는 그런 말도 해주었다.
"율동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억지로 아이의 팔과 다리를 잡고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아이들의 뇌는 아직 발달중이어서 생각하는대로 보는대로 몸을 조율하는 데에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거든요. 우리 보호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크게 노래부르고 더 신나게 몸을 움직이는 거에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고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세요."
초보 엄마로서 그것보다 따뜻하고, 강렬하고, 철학적인 육아 조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음악 교실에서 뿐이 아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염려 라는 이름 아래 '정상'에 대한 임의적인 기준을 만들고서는 실망하고, 걱정하고, 통제하는 실수를 반복하기 일쑤다. 우리는 또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왔기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걱정하고, 통제하는 실수를 반복해왔고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더 크게 웃었고 더 우스꽝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얼음처럼 굳어있는 아이 앞에서 30년간 봉인된 음악성대를 풀고 즐기는 척 하는 것이 처음부터 쉬웠던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아이를 위해서도, 나의 내면 아이를 위해서도. 척하다보니 노래가 편해졌고 척하다보니 정말 음악 수업이 즐거워졌다. 기다려졌다.
뮤직클래스를 한지 벌써 1년이다. 티처 코리의 말대로 아이는 모든 것을 쑥쑥 흡수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의 모든 율동을 따라하고, 침대 위에서도 밥을 먹을때도 장난감 놀이를 할때도 뮤직 클래스에서 배운 노래를 흥얼거린다. 나의 지시나 설명 없이 스스로 관찰하며 터득한 것이다.
월요일 아침, 성당 강당의 나뭇바닥 위에서의 뮤직클래스는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모든 기대와 부담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그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안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미묘함을 알아채기 전에는 안개로 자욱한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 가혹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든 안개가 차갑고 우울한 것은 아니었다. 안개 중에는 도톰하면서도 가벼운 담요의 포근함을 닮은 안개도 있다.
안개가 알록달록한 집과 언덕으로 울퉁불퉁 채워진 도시 위를 살포시 덮노라면, 도시의 소음은 뱃고동처럼 잔잔하게 가라앉고 저 멀리 골든게이트파크의 풀냄새가 사방에 퍼지며 가로등 불빛은 흐릿하게 퍼져 촛불보다 낭만적이다. 우리가 오랜만에 저녘 데이트를 하기 위해 찾은 프렌치 레스토랑 재지Zazie도 그 노란 간판 때문인지 아니면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실내의 조명 때문인지 하나의 따뜻한 촛불처럼 보였다.
그 데이트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서로를 응원하고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였다.
체크 표시를 해나갈 수록 오히려 목록이 더 늘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유난히 드는 올해의 체크리스트 위에서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얄궂은 직장 상사라도 된 것처럼 닦달하고 쪼아댔다. 공동의 목표와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자꾸만 다투었던 것은 안개의 수많은 종류 만큼이나 다양하고도 미묘한 각자의 감정과 에너지와 일상의 맥락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접 거리를 걸어보지않고는 오늘 안개의 온도와 습도를 헤아릴 수 없듯이 ‘오늘 하루 어땠어’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라고 직접 물어보아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본인 마음의 자욱함에 갇혀서, 때로는 불안의 추위에 평정심을 잃어 상대편을 지레짐작했다.
재지에는 행복한 기억이 많다. 승진을 축하하러, 결혼 기념일을 기념하러, 임신을 축복하려, 집을 계약한 것을 자축하러 이 곳에 왔었다. 지인들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꼭 이 곳을 데려오기도 했다. 주말 아침마다 콜밸리의 조용한 중심부는 재지의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찾은 사람들의 행렬로 채워졌고, 그 모습을 본 지인들은 잔뜩 흥분을 하곤 했다. 재지는 늘 흥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음식을 대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녘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나의 "해피 플레이스(Happy Place, 누군가에게 만족과 평화를 주는 심리적 순간이나 물리적 공간을 일컫는 용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그랬던걸까. 아니면 나의 일상에는 해피 플레이스를 알아차릴 여유도 생각해볼 여지도 없었던 것일까.
기쁨을 누리기 위해선 먼저 특정 자격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축배를 들기에 나는 아직 너무나 미완이고 불안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기쁨들이 유예되었고, 곧 체크리스트의 쓰나미에 침수당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체크리스트의 길이도, 난이도도 올라간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 영원히 미완이라는 사실도.
재지에서 L과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리 작더라도 꼭 축하하는 의식을 하자고.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최근 선물처럼 찾아와준 ‘기쁨’에게 ‘기분이 어때?’ ‘진짜 고생했어’ ‘자랑스럽다’ ‘얼마나 멀리 온건지 실감이 나니?’라고 물어봐 주었다. 우리의 테이블을 담당한 서버는 지난번 임신성 당뇨로 한참 고생중일 때 방문했던 나를 알아보았다. 그 때 디저트를 먹지 못해서 너무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고, 이제는 먹을 수 있겠냐고 물어봐 주었다. 그녀는 나와 L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양고기 토마토 스튜와 볼케이노 초콜렛 케이크로 따뜻하게 채운 배를 안고 나선 저녁 8시의 고요한 거리, 어느새 도시 전체에 짙게 퍼진 안개는 마치 우리의 포만한 기쁨과 따뜻한 감사함의 작은 알갱이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안개를 담요삼아 서로를 끌어안듯 조용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