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는 것 어떻게 생각해?"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물었다.
"뉴욕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이제 뉴욕을 떠날 때가 온 것 같아.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사실 그 때의 나는 샌프란시스코가 어디에 있는지도, 그곳이 어떤 기후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들로 유명한지도 알지 못했다. 한국에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이 알려지기도 전인 시절이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오클라호마의 어느 시골 이름을 댔더라도 차이를 모른채 "그래. 가자."라고 했을거다.
샌프란시스코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채 그곳으로 이주하자는 남자친구의 말을 승낙한 것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이주하기 전에 샌프란시스코를 미리 방문해본다던지 아니면 적어도 샌프란시스코 관광서적 조차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영화들을 찾아 보았다. 제니퍼 로페즈의 <웨딩플레너(The Wedding Planner)>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는 공원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을, <피너츠 송(The Sweetest Thing)>의 카메론 디아즈가 살던 동네처럼 프란시스코에는 언덕이 많다는 것을, 키아누 리브스의 <스위트 노벰버(Sweet November)>에 나오는 해변을 보고 샌프란시스코가 해변 마을같은 작은 도시라는 것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해 했다.
아마도 대단히 사랑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불안도 걱정도 다 잊어버릴 만큼. 로맨틱 영화로 미래를 점쳐볼 만큼.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의 어느 허름한 바에서였다. 그 바는 미국의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 가든 하나씩은 있을 법한 그런 곳이었다. 신분증 검사를 느슨하게 하고, 바닥은 맥주 자국으로 끈적해서 걸을 때마다 쩍쩍 소리를 내고, 뜬금없이 카우보이 테마의 장식들이 달려있는, 그래서 촌스럽고 지저분하지만 만만하고 편안한 곳 말이다. 땅값이 비싼 뉴욕 맨하탄 한가운데에 그런 바가 존재하는 게 신기한 건지, 아니면 그런 곳을 월요일 저녘부터 찾은 우리가 더 신기한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L은 뉴욕을 방문하는 이가 한번쯤 환상으로 그려볼만한 전형적 뉴요커였다. 커다란 키와 짙은 수염, 파란 눈과 반듯한 정장, 나는 지금 굉장히 멋진 곳에 중요한 일을 하러 간다는 확신이 담긴 빠르고 힘찬 걸음, 법률 조항과 이익을 나타내는 각종 숫자, 업계 전문 약어가 빼곡히 적힌 문서가 가득 든 서류 가방, 룸메이트를 두지 않고도 거뜬히 맨해튼에 한가운데 살고,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높고 반짝이는 건물 허리 언저리에 자신의 사무실을 둔, 젠틀하지만 다가가기는 어려운 그런 사람. 그를 미드타운의 허름한 바가 아닌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위에서 만났더라면 기가 죽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L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한 공통분모는 우리 각자 그날 계획해둔 약속이 꼬이고 꼬이다 이 처음보는 허름한 바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험을 한답시고 대학교에 휴학신청을 한뒤 뉴욕에서 매일 같이 이벤트와 파티를 기웃거리는 장기 여행자였다. 뉴욕은 날카로운 눈빛과 카리스마로 꿈을 향해 돌진하는 드리머들의 꿈의 무대로 알려져 있지만, 돈도, 꿈도, 목표도 없이 그저 넘쳐나는 젊음과 열정만으로 가득한 이에게도 완벽한 놀이터였다. 1달러짜리 피자 한조각으로 때우는 저녘에 실감하는 꿈의 부재마저 낭만적으로 보일 만큼.
우리는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술에 취할수록 목소리를 키우고 논리력을 상승시키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껴서 대화 나눌 틈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나에게 블루문 한잔을 건넸다. 오렌지를 띄워먹는 벨기에 맥주라고 했다. 처음 맛보는 새콤한 맥주맛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는 그날 밤 이후로도 눈이 휘둥그레해 질 만한 것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알려주었다. 우리의 데이트는 리듬감있고 로맨틱했다. 어퍼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에서 뉴욕시티발레단의 공연을 본 후 소호(SOHO)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저녘을 먹고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서 디저트를 먹은 다음 로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식이었다.
"이 칵테일이 입맛에 맞지 않나요? 그럼 바텐더에게 돌려주고 새로 주문해요. 시킨 칵테일을 먹지 않고 남기는 것보다 그게 더 바텐더에 대한 예의일 수 있어요." 예쁜 이름 하나에 반해 시켜버린 칵테일이 너무 써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텐더에게 정중하게 나의 칵테일을 돌려주었고, 바텐더는 곧 훨씬 달콤하고 부드러운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
좋아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가야할 곳을 정확하게 찾을 줄 아는 그의 모습은 20대 초반에 잔뜩 흔들리며 성장하고 있던 청춘의 눈에는 대단한 매력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땐 그래서 당연히 우리의 인연도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데이트를 계획해왔던 것처럼 그는 벌써 자연스럽고 신속하게 다음 로맨스를 찾아 나서겠지. 어쩌면 이미 다음 데이트들을 잡아놨을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의 본격적 연애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 돌아오고서 나는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해외에 나간 사이 친구들은 화려한 대외활동과 스펙을 쌓아 놓은 상태였다. 어떤 친구들은 이미 대기업에서 인턴을 하고 있거나 인턴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놓았다. 반면 뉴욕 길거리에서 배운 나의 영어는 영어 토론 동아리 같은 곳에 가입하기도 민망한 실력이었다. 더 넓은 세계,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와서 확실히 나의 눈과 귀와 마음은 틔어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자기소개서 위에 200자 이내로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자신감이 바닥이 됐을 때 괜히 심술이 나서 L에게 따져보기도 했다. 뉴욕에서 연애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힘든 장거리 연애를 왜 굳이 나랑 하고 있느냐고.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데이트는 할만큼 해봤고,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그런 사람을 찾는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아니까. 나는 이제 평생 함께 할 사람이랑 연애하고 싶어."
그가 나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뉴욕에서 보았던 것이 지금 한국에 있는 나에게도 남아있는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그 평범하고 볼품없던 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왜 집근처에 바텐더가 손님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칵테일을 다시 만들어주는 고급스러운 칵테일 바를 놔두고 멀리 미드타운의 허름한 바를 찾아오는 것일까? 나도 아직 모르는 어떤 모습을 그가 알아챈 것일까?
L이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좋은 기회가 샌프란시스코에 생겼다며 함께 그곳으로 이주하자고 제안했을 때 내가 망설임없이 응답했던 건, 한결같이 나를 믿고 응원을 보내준 그에게 나 역시 믿음과 응원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를 지지하기 위해 가야할 곳이 샌프란시스코든, 마이애미든, 시카고든, 아니면 이름도 모를 시골이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샌프란시스코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비록 영어실력이 엉망이고, 한국의 어느 대학졸업 증명서만 가지고서 미국 기업들을 상대로 취업에 도전을 해야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나에게서 보았다는 그 특별한 것을 잘 펼쳐 보이고 싶었다.
스스로 궁금하기도 했고, L의 믿음에 저버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에게, 나에게, 세상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짐했다.
'누구의 아내', '한국에서 온 이민자'와 같은 타이틀에 굴복해서 나의 잠재력의 불씨를 꺼버리지 않겠노라고.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당당하고 독립적으로 나란 인간을 성장시키겠노라고.
그래서, 그렇게,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