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위험하고 더러울까
샌프란시스코에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다. 서울의 강서구 크기만한 이 작은 도시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배경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에게 거는 거짓말이었다.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에는 자연히 기대가 생겨난다. 기대는 필연적으로 실망을 만든다.
샌프란시스코를 향한 실망은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창문을 까맣게 태닝한 검은 대형밴과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차림을 한 거대한 남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L의 새 직장에서 보내준 픽업 서비스였다. 묵직한 밴은 곧바로 고속도로 위에 올랐고 20분도 되지 않아 샌프란시스코로 진입했다.
방문자는 공항에서 도시로 진입하면서 표현할 수 없는 설렘을 경험한다. 지난한 비행과 시끌벅쩍한 공항을 마침내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목적지를 첫눈에 목격하게 되니 말이다. 서울은 드넓은 한강이, 뉴욕은 다리 너머로 보이는 마천루가 방문자를 맞이하지 않던가.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소마(SOMA, South of Market Street의 약자) 지역의 거리 부랑자들이었다. 유럽 배낭 여행도 해보았고 뉴욕과 멕시코 시티에도 잠깐씩 살아보면서 거리 부랑자들을 심심치 않게 봤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의 모습은 달라보였다. 그들은 거리 위에 공격적인 태세로 터전을 꾸려놓고 있었다. 세워진 지 몇 주는 족히 되었을 법한 텐트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가스레인지, 두꺼운 담요, 라디오, 먹다 남은 음식 쓰레기들이 거리로 흘러 넘쳤다. 마약에 취해 소리를 지르거나 서서 몸을 기억 자로 구부린 채 잠이 든 이들도 있었다. 창문이 꾹 닫혀있었지만 길거리의 냄새가 차 안으로 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 곳이랑 텐더로인(Tenderloin)이라는 곳을 조심하십시오."
정장의 남자가 운전을 하던 중 짤막하게 충고했다.
차는 소마 지역을 지나 반 네스(Van Ness Avenue)라고 불리우는 대형 도로에 진입했다. 반 네스는 샌프란시스코 배경의 로맨스 영화에서 보던 도시 풍광과는 정 반대였다. 알록달록한 주택들 대신 투박하게 네모진 회색 콘크리트 빌딩들이 서있었고, 자동차 딜러, 악기 수리점, 매트리스 상점과 같은 창고형 비즈니스가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왕복 6차선 도로 위에서 차들은 고속도로에서처럼 쌩쌩 달리고 있었고, 사방으로 난 높은 건물들이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도로 전체가 음침해 보였다. 정장의 남자는 잠시 정차를 하고는 어느 건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우리가 머무를 아파트의 열쇠를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L의 회사는 뉴욕에서 이주를 하는 새직원을 위해 공항 픽업 서비스 뿐만 아니라 여러 혜택을 마련해주었다. 걸어서 출근할 수 있는 거리에 작은 원베드룸 아파트를 마련해주었고, 대형 트럭으로 뉴욕 아파트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실어 샌프란시스코의 새 보금자리까지 날라주었다. 냉장고 속 유통기한이 지난 샐러드 드레싱까지 이사를 왔다. 회사가 마련해준 아파트는 로어 놉힐(Lower Nob Hill, 직역하면 '놉 힐 아래쪽')이라는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오피스 빌딩이 가득한 파이낸셜 디스트릭트(Financial District), 동남쪽으로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쇼핑 구역인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 남쪽으로는 정장의 남자가 조심하라고 경고한 텐더로인(Tenderloin)이 있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이 '로어' 놉힐 인 것은 바로 북쪽에 놉힐이라는 동네가 있기 때문이다. 호화로운 벽돌식 건물들과 유수한 역사를 지닌 대형 교회, 그리고 음모론으로 더 유명한 남성 사교클럽 프리메이슨(Freemansory)까지 있는 부유한 지역이다. 우리의 동네는 놉힐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하고 텐더로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억울한 지라 로어 놉힐이라는 애매한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했다.
갑옷같던 대형밴에서 내리자마자 12월의 차갑고 습한 바람이 온몸을 얼싸 안았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배고프지? 벌써 저녘먹을 시간이네. 근처에 먹을 곳이 있는지 찾아보자." L이 자켓 옷깃을 세우며 말했다. 우리는 짐을 아파트에 올려놓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도시는 마치 누가 바둑판 한쪽을 들어올려 기울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장 높은 북쪽의 놉힐에서 골프공을 떨어뜨리면 데굴데굴 굴러서 남쪽의 텐더로인을 지나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굴러갈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파른 언덕 사이사이로 빌딩들은 빼곡히 서 있었고 차들은 씽씽 달렸다. 좁은 인도에는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었고, 길 건너편에 섹소폰을 열렬하게 부는 거리 음악가가 가뜩이나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에 합류했다. 후각마저 나를 압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각 빌딩에서 쓰레기 수거를 위해 길 위로 꺼내놓은 쓰레기통에서 피어오르는 쓰레기 냄새와 처음 맡아보는 진한 풀냄새가 얼굴을 들이쳤다. 그 진한 풀냄새는 나중에 안 거지만 마리화나 냄새였다. 대마초 사용이 캘리포니아에서 합법화 훨씬 전이었음에도 도시에는 그 풀냄새가 한국의 길거리 떡볶이 냄새처럼 흔하게 퍼지고 있었다. 낯선 도시의 온도와 리듬과 소음에 압도되어 한참을 헤맸다. 헤매다가 보니 어느새 텐더로인이었다. 소마에서 지나친 부랑자들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시끄러운 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빠르게 스쳐가는 나를 향해 침을 뱉었다. 누군가는 나눠줄 현금이 없다는 말에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내 간단한 파스타와 샌드위치를 파는 레스토랑을 찾아내었을 때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들처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서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질 줄 알았다. 따뜻한 파스타 한 접시를 사이좋게 나눠먹으며 허기를 채울 줄 알았다. 장거리연애를 하던 파트너와 마침내 한도시 한 아래서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만끽하며 탄성을 내지를 줄 알았다. 부드러운 R&B 음악과 아늑한 조명으로 채워진 그 작은 레스토랑은 내가 주연인 로맨스 영화의 가장 어울릴만한 해피엔딩 신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메뉴 조차 읽을 수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 종업원의 자리 안내를 받기도 전에 가장 먼저 보이는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 앉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옆에서 L이 뭐라고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귀가 꼭 막힌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그때껏 가장 강렬하게 경험해 본 '현실 자각 타임' 이었다.
현실 자각의 충격은 너무나 강렬했다. 가파른 언덕. 더러운 거리. 삭막한 풍광. 차갑고 습한 날씨, 질서도 낭만도 없는 도시의 밀도, 예측 불허의 거리 부랑자들, 냄새. 잠깐의 시간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그것이 이제 내 삶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 감정이 실망이었음을 알지만, 당시에는 감정을 언어화 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망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했을 거였다.
샌프란시스코를 찾아오는 많은 지인들이 말한다. "샌프란시스코가 위험하고 더럽다고 주위에서 하도 만류를 해서 오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샌프란시스코에 관한 기사가 뜨면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이런 댓글들을 심심치않게 접하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몇 년 전에 갔었는데 완전 실망하고 왔어요."
그런 코멘트들 앞에서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첫 날을 떠올린다. 그날 느꼈던 실망과 충격을 기억해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관광지는 관광객이 떠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된다. 나 역시 그날 이민자가 아니라 관광객으로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더라면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참 별로였다고 말했을거다.
도시도 사람과 마찬가지여서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 특정 성격이 어느 상황이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매력이 되기도 '싸가지'가 되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는 그런 면에서 녹록하고 원만한 상대는 아니다. 첫인상이 썩 좋은 상대는 아니라는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관한 소문은 아주 오랫동안 샌프란시스코와 열애를 해온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새로운 부를 찾아 무작정 서쪽으로 향하던 골드러쉬 개척자들에 의해서, 벌거벗은 채로 자유와 평화를 외치던 히피들에 의해서, 그리고 불가능해보이는 것의 가능성을 꿈꾸던 엔지니어들에 의해서. 그들의 샌프란시스코 예찬은 관광지의 풍경이나 도시생활의 편의에 영감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샌프란시스코와 교감했고 도시를 캔버스 삼아 자신들의 비전을 펼쳐보였다. 도시를 개척하고, 성장시키고 변화를 일궈냈다. 모래밭일 뿐이던 샌프란시스코의 서부를 푸르른 공원과 안전한 주거동네로 탈바꿈 하였고, (비록 많은 갈등과 아픔을 수반하였으나) 성적소수자와 이민자들이 환영받을 수 있는 도시로 만들었다. 도시 위 에이즈가 드리운 그늘을 무지갯빛 깃발로 함께 걷어내었고, UN을 세웠고, 실리콘밸리를 피워냈다.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하는 이들의 도시 예찬가는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청춘이 사랑의 승낙을 갈구하며 부르는 세레나데라기 보다는 오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의 위기를 겪고, 질병을 극복해낸 인생의 동반자가 금혼식을 맞이하여 불러보는 부부의 애창곡 같은거다.
그러나 이 애창곡이 만들어내는 판타지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이어서 (때로는 샌프란시스코 자체보다 아름다워서) 샌프란시스코를 제대로 경험할 준비가 안된 사람들 마저 유혹하거나 안심시킨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의 대도시이니까 뉴욕이나 엘에이와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헐리우드에서 만들어낸 샌프란시스코 배경의 로맨스 영화 그대로 이지 않겠느냐고, '미국인들이 은퇴하고 살고 싶은 도시 1위'에 뽑혔다고 하니 딱히 준비하지 않아도 누구든 무난하게 적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몇달이 지나 나를 방문한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었다.
"실제로 만난 시간은 얼마 안될 만큼 아주 긴 장거리 연애였는데, 이제는 낯선 도시에서 그것도 한 지붕아래서 붙어 살게 되었네. 결정이 어렵진 않았어?’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는지 모른다.
‘어머… 그렇게 보니까 엄청 무모한 결정이었네!!!!!’
비록 장거리 연애지만 2년 동안이나 충실하게 미래를 계획하고 자주 깊은 대화를 나누어 왔기에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는게 너무나 많았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나와 L의 본격적인 연애는 시작되었다. 한지붕은 커녕 같은 도시에서 살아본 경험이 뉴욕에서의 몇주를 제외하고는 없기에 각자의 하루의 바이오리듬이나 사소한 습관, 하다못해 빨래거리를 분류하는 방식마저 알지 못했다. 13시간의 비행거리와 13시간의 시차만큼 먼 거리를 오고 간 우리의 채팅방 속 텍스트는 현실과 화합을 이야기하고 있었을 지언정, 행간 속에서 이상적인 파트너에 대한 개인적인 판타지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달리 '진짜' 연애는 (그리고 더 나아가 결혼생활은) 계속해서 서로의 판타지를 벗겨내는 작업과 다름 없었다.
막연한 기대와 판타지를 품었던건 샌프란시스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샌프란시스코 자체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운타운과 첫날 경험한 몇몇 지역을 샌프란시스코의 전체인냥 판단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나의 편협한 경험을 바탕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재단했다. 전 남자친구를 못잊는 여자가 그를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인연을 비교하려 드는 것처럼 샌프란시스코를 우리가 사랑을 싹틔우던 뉴욕을 기준으로 끊임없이 비교했다. 뉴욕에 비하면 샌프란시스코는 지루하고 (모든 바가 새벽 2시도 되지 않아 문을 닫는다) 조그맣고 (뉴욕 인구가 샌프란시스코 인구에 비해 10배 많다) 패션감각이 없는 도시였다.
샌프란시스코를 향한 판타지와 기대의 틀을 깨지 못한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눈을 흘기며 떠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때 '샌프란시스코는 망했다(San Francisco is Dead)'가 미디어에서 슬로건처럼 퍼질 때에도 그랬다. '역시나 샌프란시스코는 이게 문제야.' '그래 정말 이 도시는 죽어가고 있어!' 라고 외치며 많은 이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더 안전하고, 더 물가가 싸고, 덜 문화적 충돌이 덜해보이는 곳으로 이주했다.
모든 연애가 판타지를 철저히 산산조각내야 하고 그래야 진짜 사랑을 달성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연인들에게는 서로의 판타지를 어느정도 지키고 존중해주어야 할 의무도 있다. 내가 상대에 걸고 있는 기대가 진정 나의 행복과 삶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인연은 마무리하는게 옳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분명히 옳은 결정이었을거다. 다만 실망에 잠식당하기 전에, 인연을 떠나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번쯤 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상대를 판타지와 기대의 틀을 넘어서 까지도 바라보려 했는지. 열린 호기심을 발휘해 보았는지.
사랑에 빠진 인연이 연애를 하는 연인으로, 그리고 가정을 이루는 동반자로 성장하는 과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운명이 이끄는 자연스러운 진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곳곳이 지뢰밭 투성이인 위험한 여정이다. 인간은 다양한 면을 품는 법이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2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일지라도 이혼도장을 찍곤 하지 않던가. 호기심을 발휘하고 기대의 틀을 넘어서 상대를 바라보았을 때 마침내 발견한 그의 새로운 면모에 또 다시 사랑에 빠질지 회복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의 실망적인 첫인상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버거웠던 건, 내가 그 실망을 당장 떠날 수 없다는 사실, 그 실망을 살아내야 한다는 진실을 직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실망을 극복하기 위해, L과의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 더 간절하게, 더 적극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숨은 매력과 아름다움을 찾아 나섰다.
골드러시 시대의 서부 개척자들과, 히피들과, 엔지니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의 색깔을 용감하게 표현하고 환경과 능동적으로 교감할 줄 아는 인생의 '개척자'들이었다. 내가 내 인생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했을 때, 샌프란시스코를 적극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했을 때, 샌프란시스코와 나의 본격적인 연애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