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풀코스를 뛰었던 게 코로나 전인 2018년이었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아이구, 7년 전이다'. 그동안 달리기를 아예 중단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뛰었던 기간에도 고작해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30분에서 1시간이 전부였다. 약 5개월 후가 대회날인데, 81 km를 뛰기에는 택도 없는 몸상태다.
챗 지피티(ChatGPT)에게 5개월간의 훈련 계획을 짜달라고 부탁을 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멋들어진 월별 주별 훈련계획표를 받았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을 빼고는 매일 훈련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친구, 참 쉽게 말하네.' 매일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했다.
마침 어떤 울트라 마라톤 러너가 유튜브 동영상에서 달리기 출퇴근을 강추했다. '이거다. 나도 달리기로 출퇴근을 하자.' 얼마 전에 옮긴 직장이 집에서 뛰어가면 대략 5 k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주 2-3일의 재택근무가 뉴 노멀인 코로나 이후 시대에서 주 5일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했을 때 '요즘 시대에 뭐 이런 회사가 다 있나?'라고 불평했는데, 이제 보니 이것도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나 보다. 출퇴근 달리기를 시작했다. 퇴근길 달리기가 즐거운 건 물론이고, 출근길이 설레어졌다. 달리기로 인해.
다행히 집에서 회사까지 뛰어가는 길은 대부분이 자전거 도로이다. 집에서 백 미터만 뛰어가면 나오는 국립공원을 가로질러간다. 옆에서는 이름 모를 여러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30m쯤 되는 거목들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나무 사이로 파아란 하늘도 보인다. 간지 나는 쫄쫄이 옷을 입은 한 무더기의 사이클리스트들이 비싸 보이는 로드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간다. 나는 20년 된 티셔츠를 입고 뛰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면 맥쿼리 대학 캠퍼스에 다다른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을 보면 나도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때가 좋았는데...' 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걸 안다. 캠퍼스 가운데를 통과한 후 신호등 하나를 거쳐 1 km 정도 뛰면 회사에 도착한다. 다행히 회사에는 샤워시설과 내 개인 락커가 있다. 땀으로 젖은 옷을 훌떡 벗고 샤워를 한다. 상쾌한 하루의 출발이다.
가수 션이 장마철에도 뛴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 비가 오더라도 뛰었다. 막상 우중에 뛰어보면 안다. 달리기 전에는 주저하는 마음이 있지만, 첫 발을 떼고 나면 비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국립공원 가운데에는 조그만 개울이 하나 있다. 전날 비가 많이 오게 되면 개울물이 불어나서 발목이나 무릎 아래까지 올라온다. '하는 수 없지' 하며 신발과 양말을 벗는다. 힘찬 물살을 느끼며 조심조심 건넌다. 발에 남아있는 물기를 양말로 닦는다. 다시 달린다.
어느 날이었다. 마치 한국의 장마철 비처럼 밤새 내내 많은 비가 내렸다. 북쪽 지방에서는 폭우 대피령까지 발령되었다. 아침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양말 벗고 개울을 건너야겠네' 생각하며 개울까지 뛰어갔다.
그런데... '망.했.다!'
평소 비가 많이 와도 무릎 높이로 개울 폭이 2m가 채 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서너 배로 늘어났다. 상류에서 토사가 밀려 내려와 어디가 건너편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거 건너다가는 울트라 마라톤이 아니라 황천 마라톤 직행이겠다.'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교통 앱을 열어 버스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날은 챗 지피티 코치도 양해해 줄 것이다.'
퇴근 달리기 할 때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와 산책을 하는 엄마 아빠들이 종종 보인다. 천연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는 예닐곱 되는 아이들이 빨간 유니폼을 입고 자기만 한 축구공을 차고 있다. 10m 쯤되는 조그만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눈을 들면 '와, 이쁘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황금빛, 보라색 그리고 온갖 색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노을이 펼쳐진다.
출퇴근할 때 마주치는 하늘, 나무, 바람, 새소리가 소중하고 감사하다. 산책하는 사람들, 쌩하고 지나가는 사이클리스트들, 반대편에서 뛰어오며 손을 들어 인사하는 러너들이 반갑고 감사하다. 달리기가 가져다준 매일 매일의 소확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