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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된 최애 동대문 티셔츠를 입고 달리기

by 박유신 Scott Park

2005년 3월 동아 마라톤 (서울국제마라톤)을 신청했다. 기념품은 그동안 봐왔던 밋밋한 티셔츠가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채용해서 동대문과 그 주위를 달리는 러너들을 앞면에 프린트한 간지 나는 마라톤 티셔츠였다. 한눈에 반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의 최애 달리기용 티셔츠가 되었다. 올해가 2025년이니까 무려 20년 동안 입고 달려왔다.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주최 측도 질세라 멋진 기념품을 내놨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뛰기에는 추운 초봄 또는 늦가을용 윈드재킷이었다. 얇은 옷감인 데다 후드까지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가슴에 새겨진 태극마크는 마치 내가 국가대표가 된 듯이 뛰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주 입고 빨았더니 태극마크가 모두 지워져서 국가대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검은색 쫄쫄이 긴바지도 어느 마라톤 대회에 신청해서 기념품으로 받았다. 동마(동아마라톤)와 비슷한 시기였다. 연두색 마라톤 장갑도 20여 년이 되어가니 왼쪽 엄지손가락 끝부분에 조그만 구멍이 뚫렸다. 그래도 앞으로 10여 년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호주는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이다. 울트라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7월 말은 호주에서는 한겨울이다. 겨울이라고 해도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지만 새벽 최저기온이 섭씨 4도에서 8도쯤 되니 제법 춥다. 울트라 연습을 하는 시기는 가을과 겨울이었다. 자동차라면 폐차기간이 한참 지난, 20년 된 동대문표 티셔츠, 태극마크가 지워진 전국가대표 윈드재킷과 쫄쫄이 긴바지에 구멍 난 마라톤 장갑을 끼고 열심히 달렸다.


그렇다고 20년이 지난 신발까지 신고 달린 것은 아니었다. 주로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로드 마라톤과는 다르게 트레일 마라톤은 흙, 돌, 작은 자갈 등이 있는 길을 달려야 하므로 신발의 접지력이 매우 중요하다. 새 트레일 마라톤 신발을 사서 신고 달렸다. 발만큼은 VIP 대우를 받았다.


울트라 마라톤 대회 신청 후에 새로 산 장비들이 꽤 있다. 살로몬의 Active Skin 12 러닝 베스트, Led Lenser의 MH10 헤드램프 그리고 100% 하이퍼 크래프트 글로스 블랙 선글라스. 유명한 제품이라 그런지 각각 20-30 만원씩 하니 지출이 거의 백만원에 육박했다. 누가 말했나? 마라톤이 돈이 안 드는 운동이라고.


20년이 된 옷과 따끈따끈한 새 장비는 제법 잘 어울렸다. 마치 클래식 카와 최신 내비게이션을 조합한 것 같달까. 내 마음과 정신도 그렇게 옛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롭게 공존하길 바라며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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