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결혼생활 동안 남편과의 가장 큰 갈등 요소는 바로 집이었다.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편안히 쉬고 싶은데, 부인인 내가 치우지 않았다며 화를 냈다. 집이 더러워서 싫은 건가, 아니면 그냥 내가 싫은 건가. 헷갈리기도 했다. 의식주에 무한한 의미를 두고, 거기에 맞추지 못하는 남편이 때론 미웠다. 그의 까탈스러움과 옹졸함에 화가 났고,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집에서 일까지 하는 내게 그저 ‘바라기’만 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남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둘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정돈 컨설팅을 받자고 제안했다. 하루 동안 6-7명의 전문가가 집을 방문하여 쓰임새 좋게 정리정돈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50만 원의 금액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더 이상은 집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아 한번 해보기로 했다. 집의 가구 배치와 물건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100리터 쓰레기봉투가 10개 이상 버려졌고, 분리수거와 버리는 옷도 상당했다. 당시 신생아 육아 중이라 집에는 아이용품으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얻은 육아용품과 옷들이 창고 구석구석 쌓여 있었다. 정리정돈 컨설팅을 받고, 여유 있는 거실이 생겨났다.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이 가장 예뻐야 한다는 조언에 물건을 최소화했다. 태교 하면서 만든 도자기를 전시하고, 로열 알버트 티세트를 보기 좋게 놓아두었다.
컨설팅의 효과는 딱 3개월 갔다. 150만 원이라는 금액이 아까워 아등바등 살았던 딱 그만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신없이 집을 정리했지만, 조금만 지나도 짐으로 집이 쌓여 있었다. 신혼 때 산 쓰지 않는 그릇세트, 오지 않는 손님을 위한 이불세트, 양가에서 받는 반찬 등등. 집에서 밥도 거의 사 먹고, 주말이면 놀기 바쁜 우리에게 집은 여전히 잠깐 스쳐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몇 년이 흘렀다. 이사온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인테리어 공사가 하고 싶어 졌다. 근처에 주택을 지어 예쁘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주택에 산다는 것’이 아이 어릴 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전세를 주고, 주택으로 이사 갈까 싶어서 주택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아파트에 사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새벽녘 미사리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예봉산에 달이 걸려 있는 풍경을 보며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이든 하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며 소중하게 이어온 일도 싫어졌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반복되는 업무, 하는 게 당연한 호의. 지겨웠다. 지쳤다. 아등바등 사는 삶에 지쳐 버렸다. 왜 매번 나만 희생해야 하는 걸까. 아무도 나를 생각해주지는 않는 걸까. 아이도, 남편도, 일도, 가족도 다 밉기만 했다. 나 혼자만의 성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내고 싶어 졌다. 해야 하는 책임의 범위를 줄이고 싶었다. 엄마 노릇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일단 일을 쉬어야겠다 싶었다.
일은 줄였다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쉬면서 뭘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봐. 아무 생각 없이 미드도 보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사실 지금까지 집에 있으면서도 맘 편하게 쉴 날이 없었다. 쉬기 시작하면서 아이들 오기 전까지 보고 싶은 미술전시회도 보고, 친구들과 대만 여행도 다녀왔다. 책도 많이 읽었다. 가키야 미우 작가들의 책을 훑어 내렸다. 평일 오전, 도서관에 혼자 여유 있게 걸어가 읽고 싶은 책을 맘껏 골랐다. 아이들 학교 돌아오면, 먹고 싶다는 간식도 준비했다. 소소한 나날이었다. 평범한 전업주부의 삶이 그러했을 것이다. 결혼한 지 11년 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나른함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해내야 하는 나의 정체성에서 벗어난 것 같은 쉼이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쉬다가 '미니멀 라이프'를 모집한다는 블로그 글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매일 3개씩 버리고, 정리된 가방을 인증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지금껏 집이 너무 더러워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이벤트처럼 버렸는데, 누군가와 함께라면 꾸준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시 정리정돈 컨설팅을 받는 것보다 이쪽이 더욱 효율적이겠다 싶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반짝반짝 한나님의 나도 미니멀 라이프'는 신세계였다. 집에 이렇게 쓰레기가 많았나 하는 자각과 함께 매일매일 50리터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버려 나갔다. 계속 버려도 집에는 버릴 쓰레기들로 넘쳐났다. 처음에는 쓰레기만 버렸다. 고장 나거나 짝이 맞지 않아 쓸 수 없는 것들을 버렸다. 하루에 3개씩 버리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러면서 1년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쓸만한 아이템은 동네 육아 카페나 당근 마켓을 통해 팔았다. 20대에 멋모르고 샀다가 이제는 너무 무거워서 쓰지 않는 명품 가방, 아이들 철 지난 옷들, 아들이 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마련한 발란스 바이크도 팔았다. 신혼시절 쓰다가 올드한 느낌이 들어 쓰지 않는 은수저, 20대에 가지고 있었던 짝 안 맞는 귀걸이도 모두 처분했다. 짝 안 맞는 귀걸이 판매는 지금까지 물건 판매한 금액 중 가장 최고가를 경신했다. 역시 귀금속은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은보다는 금 팔 때가 훨씬 쏠쏠했다. 집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아이템들 정리해 팔았더니 무려 284,000원이나 받을 수 있었다.
20년 전, 100만 원 넘게 주고 샀던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진작에 팔았어야 하는데 10년 전만 해도 언젠가 계속해서 사진을 찍을 거라 생각해서 남겨두었다. 대학교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며 3번의 전시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 준 카메라였다. 어학연수 시절 사진학 수업을 들으며 외로움을 잊게 해 준 고마운 친구였다. 하지만 필름카메라는 아이 돌보면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필름을 인화해야한다는 것도 너무 부담스러웠다. 대학교 졸업한 이후로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이제는 카메라를 정리해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을지로입구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남대문시장에 들러 팔기로 했다. 너무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나가서인지 지하철 선반 위에 카메라를 두고 내렸다. 순간 갈등했다. 그냥 잃어버린 채로 둘까. 아니면 이걸 다시 찾아서 남대문 시장으로 팔러 가야 할까. 오랜 고민 끝에 5호선 왕십리 분실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30분 뒤, 방화역에 카메라가 보관되어 있으니 찾으러 가라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방화역은 우리 집과 완벽하게 반대쪽인 상황. 예전 같으면, 절대 찾으러 가지 않았을 텐데, 카메라와의 의리도 지키고, 팔아보겠다는 의지를 내세워 기어코 찾아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카메라 가게 사장님은 이 렌즈는 가격을 쳐주기 어렵다는 말부터 했다. 캐논 정품 렌즈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0년 전, 카메라 동아리 선배와 카메라를 사러 갔을 때, 정품 중고 렌즈와 시그마 새 렌즈 중 선택할 수 있었다. 그때 새 제품을 골랐던 것이 화근이었다. 20년 전의 나로 돌아간다면, "얘야, 무조건 정품을 사렴."이라고 조언하고 싶을 정도였다.
100만 원 넘게 주고 산 아이템이지만, 결국 중고로 받을 수 있었던 금액은 5만 원이었다. 카메라 가게 사장님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며 아쉬워했다. 요즘은 완전 수동 카메라가 더 비싸게 팔린다고 말이다. 굳이 큰 카메라 가방을 이고 지며 방화역까지 다녀오기에는 실소만 나오는 에피소드다.
그런 식으로 집을 차츰 차츰 비워나갔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 되는 변명 대신 그냥 비웠다.
그랬더니 삶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