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포에서 금강을 건너다.
지금까지는 항상 오후 7시 이전에 숙소를 정한 뒤, 샤워하고, 저녁 먹고, 그리고 글을 써서 발행하는 작업을 반복하다가, 오늘 대전에서는 완전히 리듬이 깨졌다.
대학, 연구소, 기업에 있는 대학 동기들이 찾아와 함께 걷고,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며 추억에 젖어 놀 때까지는 좋았다. 밤 10시가 넘어서 숙소에 들어와서, 오늘의 이야기를 이어 가려니 엄청난 무게가 눈꺼풀을 눌러 시작도 못하고 잤다.
소정리에서 국도를 따라 조치원과 공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섰다. 택준이의 고향은 조치원으로 가는 것보다 공주로 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셋은 1947년 서로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어서 집안 사정을 잘 안다. 말하자면 기존의 사회에서 기득권층으로 잘 살았다는 것이 부담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고향에서 어떤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 그 자체였다.
서로에게 “행운을 빈다.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나와 영환이는 멈추어 서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택준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조치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두 번째로 택준이네 집을 찾은 것은 그가 사망하였을 때다. 택준이는 1954년 28살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4살짜리 딸과 100일 된 아들, 그리고 명화를 남겨 둔 채.. 하영환, 박종일, 도수영이와 내가 택준이의 옷을 갈아 입히고 염을 하여 고향 뒷산에 매장하였다.
가장 말이 많던 택준이와 헤어지고 나니, 나와 영환이는 그냥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다가 전의를 지날 무렵 남매를 거느린 여인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마침 그 사람들도 대전까지 간다고 하여 동행하게 되었는데, 서울을 떠난 지 꽤 되었는지 상당히 지쳐있어서 우리는 속도를 그들에게 맞추어 길동무가 되었다.
그 부인은 40대 중반의 작은 키로 8.15 이후 평양에서 월남하였다고 하고, 남편은 대전 어느 교회의 목사라고 했다. 서울 말씨를 흉내 내려고 애쓰지만 평안도 사투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딸은 이화여고 3학년이고 아들의 이름은 달수였다. 그 후 3일간 함께 걸으며, 그 어머니가 “달수야, 달수야”하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서 그 이름이 잊어버려지지가 않는다.
영환이는 그 모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다. 원래 영환이는 정이 많고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젊은 여자나 나이 든 여자나 모두 영환이에게 호감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리더는 영환이가 되었고, 그 세 사람도 영환이의 뒤만 따르게 되었다.
영환이의 제안에 따라 우리 일행은 조치원부터는 철도를 따라 남하하였다. 내판을 지나 부강에 왔을 때 저녁이 되어 잠자리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뜻밖에도 동네 청년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검문을 당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용한 용어였다.
“동무들은 어디서 오는 일이오?”
서울에서 듣던 인민군들의 말투와 비슷하여 섬뜩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문의 주된 대상은 나와 영환이가 국군 패잔병인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조직에서 훈련된 생활을 한 좌익은 아니고, 급조된 패거리인 것 같았다.
우리는 다섯 사람이 모두 고향을 찾아가는 피난민이라고 했다. 보따리를 열어 보았으나 문제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내친김에 오늘 저녁에 묵어갈 잠자리와 저녁 식사를 제공받을 수 없느냐고 물었다. 한 청년이 우리를 여관집 비슷한 곳으로 데리고 가도니, 그 집 마루에 걸터앉은 마흔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에게 보고를 하였다.
마루에 걸터앉은 여자의 모습은 좀 기이하였다. 돼지 삶은 물이 든 커다란 자배기에 한 발을 담그고 있고, 삼배 치마저고리에 삼배 고쟁이를 입은 여자는 치마를 걷고, 고쟁이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으며, 무릎 밑 장단지는 끈으로 동여매었는데 장단지가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발목을 독사에 물린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약간 흥분 상태라 목소리는 톤이 높고, 눈은 무서운 광채를 띠어 가슴이 서늘했다.
그 여자는 양식이 없어서 저녁식사는 줄 수가 없고, 잠은 개울가에 있는 정자에서 자라고 했다. 그 정자에는 우리말고도 몇 명의 다른 피난민이 있어서 함께 잠을 잤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의 눈초리가 생각이 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내일 아침에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여자는 아마도 보도연맹원으로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여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영환이가 조치원에서 부강 매포의 철길을 따라가자고 한 것은 매포에서 금강을 건너면 건너편에 영환이의 대고모 댁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강에서 일찍 떠난 우리는 아침나절 경 매포역에서 금강을 건너기 위해 강변 백사장으로 내려섰다.
매포역은 언덕바지 높은 곳에 있고, 강의 주류는 반대편 쪽에서 흐르고 있어서 100m나 되는 백사장을 가로질러야 물가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들은 강가에 자리를 잡고 헤엄치는 데 자신이 있는 내가 먼저 강을 건너가 보았다. 한 달 정도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아서 제일 깊은 곳이 허리 정도까지 오고 물살도 완만하였다. 여인들을 업고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짐을 먼저 반대편에 건네다 놓고, 달수를 데리고 먼저 건넜다. 나와 영환이는 다시 돌아와서 나는 부인을 업고, 영환이는 여학생을 업었다. 별로 무거운 편은 아니었다. 내가 앞서고 영환이가 뒤에서 따랐다. 내가 강 가운데 물이 허리춤까지 차는 중간쯤에 왔을 때다. 난데없이 제트기의 금속성이 머리 위를 덮쳤다.
나는 대경실색하여 목만 물 위에 나오도록 몸을 낮추었다. 내 등에 업힌 부인도 물에 푹 젖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를 스쳐간 미군 제트기가 상류 신탄진 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허겁지겁 반대 편으로 건너가서 물이 무릎까지 차는 곳에 이르자 부인을 내려놓았다. 아마도 좀 급해서 부인을 거의 내동댕이 치듯 했나 보다.
건너서 보니 영환이는 여유 있게 그 여학생을 업고 강을 건넜으며, 소중히 다루어 내려놓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그 부인은 나에게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였고, 영환이에게는 더욱 호감이 가는 모양이었다. 전쟁 후에 영환이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그 여학생과 혼담이 오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언덕바지에 있는 매포역에 올라가 보았으나, 이제 매포역은 폐역이 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역 아래 길을 따라 금강변에도 내려가 보았다. 지금은 대청댐이 있어서 수량도 비교적 많고 백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강 건너편은 행정구역 상 대전시 유성구로 친구 동혁이의 회사가 있는 대덕테크노밸리가 되었다.
처음 잡혔던 물집은 나아가고 있는데 아픈 곳을 피해서 발을 디디다 보니 물집이 다른 쪽으로 번져간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람의 몸은 용불용설의 지배를 받는 모양이다. 아직 불편하기는 하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다.
대학 동기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는 앞서 언급한 아버지의 대학 동기생의 아들 주진원교수도 나와 주었다. 진원이와 나도 대학에서는 같은 과, 과학원에서는 같은 실험실에서 공부했고, 또 다른 인연으로도 이리저리 얽혀 있다.
진원이는 자기 아버님도 일제시대 말기에 학도의용군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만주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서울까지 돌아온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써 놓으셨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는 다음 차례는 진원이가 만주에서 서울까지 걸어와야 한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