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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데이나 Jul 03. 2024

우리의 두바이 마침표는 무엇이 될까?

두바이살이가 남긴 것

둘째 아이가 유치원 졸업을 했다. 작년 2월부터 지금까지 1년 반. 그동안의 두바이 생활로 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일단, 나는 5시 반이면 눈이 번뜩 뜨이는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아이들 등교가 일찍이고, 거기에 도시락, 아침, 자동차 등원까지 겹치니 7시에는 나가야 등원대란 없이 학교를 갈 수 있다. 원 없이 자고 싶은 주말에도 눈이 새벽에 떠진다.

해뜨는 두바이 새벽아침


운전은 이제 꽤 합니다만.


두바이살이 초반, 사고 날까 앞선 걱정에 앞차, 뒤차, 끼어들 옆차, 안 끼어들 옆차 다 신경 쓰느라 등원만 시켜도 너무 힘들었다. 출발 전 내비게이션을 먼저 보고, 지도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 갔고, 클락션을 거의 안 울리는 이 두바이에서도 한두 번씩 클락션 경고를 받았다.,


이제 나는 지도를 외우지 않고, 두바이에 수많은 그 어려운 회전 교차로에서도 큰 두려움 없이 지나갈 정도로 어느 정도는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평행주차는 마스터하지 못했다.

하루에 80km를 넘게 달린 날도 많았다


더위 민감도가 달라졌다.


오늘도 최고온도 40도다. 이렇게 40도가 지속되니, 이제 37도 되어도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좀 선선하네." 


그런데 이러다 또, 한국 가면 습도 탓인지 30도에도 덥다고 난리다.



나의 브라운 피부.


아들은 주기적으로 나에게 묻는다.


"엄마도 애기 때는 우리처럼 하얬어?".


뭔가 핵심을 콕 찌르는 질문이다. 한국에서도 하얀 편은 아니었지만, 두바이에 와서 정말 구릿빛 피부가 되었다. 이러다 여름에 한국에 가면 길에서 너무나 휴가 다녀온 사람처럼 티가 난다. 과연 다시 내 피부색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중동음식이 맛있어졌다. 


처음엔 그리도 안 맞던 복잡 미묘한 맛의 중동 음식들이 날씨 탓인지, 내 입맛이 변한 건지, 입에 맞아졌다. 여전히 우리는 한식을 가장 좋아하나, 한식당이 없는 경우 후무스와 피타브레드, 랩샌드위치와 비슷한 사와마르가 있는 집이면, 우리는 꽤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중동음식점들이 우리에겐 김밥천국이다.



아이들의 영어는 과연 늘었을까?


우리 중 가장 어린 둘째는 이제, 스팰링이 다 틀릴지라도, 편지며, 그림이며 모두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영어가 편해진 느낌이다. 한국어가 훨씬 더 편했던 큰 아이도 속도는 더디나 친구들과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단, 한국에서 또박또박쓰던 영어나 한글이, 필기체를 중시하는 두바이 국제학교 수업의 영향으로 정말 지렁이 글씨체가 되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학교 파닉스 수업의 가장 상위반은 한국아이들이다. 훈민정음으로 단련된 두뇌의 힘인가?


영어보다는 다양성을 배웠다.


가끔 아이들이 얘기를 한다. 반에 새로 온 친구 머리색이 자신과 같다고. 또 한 번은 누구 눈색이랑 누구 눈색이랑 똑같아서 신기했다고.


같음이 당연한 게 아니라 다름이 당연한 것으로 체득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무리 해외생활이 부질없을지 언정, 다양성에 대한 아이들의 이해도는, 다양한 국적이 모여 사는 두바이의 특성상, 꽤 높아지겠구나 싶다.


하지만, 헤어짐이 일상이 되는 곳


며칠 전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이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두바이에 온 집이라, 당연히 이별은 우리 쪽이 떠날 때라고 생각했는데 반대가 되었다. 십몇 년 후에 대학교 가서 만나자고 얘기했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겠구나.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헤어짐의 의미를 잘 모르기도 하고, 워낙 일상이다 보니,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Farewell playdate만 즐기고 오는 듯하다. 엄마인 나는 아직 이런 헤어짐이 익숙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남자넥타이를 눈감고도 할 수 있다. 


넥타이가 있는 교복을 입는 두바이 국제학교라, 학기 초반 늘 아빠에게 맡기다, 남편의 출장이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지만 내 몫이 되었다.


유튜브보고 이리저리 연습했지만 처음엔 왜 이리 매듭이 두껍게 생기고, 한 줄은 짧고, 한 줄은 길고 난리법석이었다. 이젠 1분도 안 걸리고 휘리릭 완성을 한다. 남편의 로망이던 넥타이 매주는 와이프는 되지 못했지만, 두바이에서 넥타이 매주는 엄마는 되었다. 


돌아보니 넥타이 말고도, 아이 디스코머리 땋기, 김밥, 후무스 샌드위치 만들기, 두바이 카드 포인트 쌓기, 웃으면서 "No, thank you" 하기 등 두바이에서 터득한 잔기술이 꽤 많다.


그래서, 두바이에서 행복하신가요?


두바이에서 시간이 1분 1초가 느리게 가던 시절이 가고, 어느 순간 눈떠보니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두바이는 안전하고, 아이들에게 늘 친절하고, 또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는 테마파크 같은 곳이지만, 외로웠고, 할 줄 모르는 거 투성이었고, 인공이 아닌 진짜 자연이 그리웠고, 더위와의 싸움이 쉽지 않았다. 인생이 늘 그러하듯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수없이 변하는 두바이의 장단점을 몸소 체험하며 1년 반을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고,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며 복잡 미묘하게 지냈다.


무언가 두바이는 정답이 없는 세계 같았다. 나는 논술 시험보다는 명확한 정답이 있는 수능 시험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만큼 정답 마니아인 내가 갑자기 논술 시험을 만난 것처럼,  답이 없는 이곳에서 허둥지둥거렸다.  


생일 축하는 꼭 생일이 지나서 해야 한다는 세르비아 친구부터, 김만 밥 없이 스낵으로 먹는 호주 친구에, 아이 셋넷은 기본으로, 또 아이를 갖겠다는 나와 동갑내기 영국인 친구까지 소소한 일상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가 없는 곳이 두바이다.


어디든 지역색이 있기 마련인데, 지구마을 두바이는 지역색이 아닌 자신의 색을 더 진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위스에 살면 당연히 스위스어가 익숙해질 텐데, 두바이에서는 아랍어가 익숙해질 틈도 없다.

소신과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것을 존중해 주는 두바이에서 자유를 느끼겠지만, 선택에 늘 겁을 내던 나에겐 모든 것이 모험 같았다. 매일매일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고, 대세를 따르며 편안함을 느끼던 나에게 기준표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정답 또는 오답으로 살아온 나는 두바이에서 '다름'이라는 키워드를 받아들이기 위해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나 역시 두바이스럽게, 얼마나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데 관대해졌는가는 아직 알 수없지만, 다름의 공존 속에서 나의 다름은 무엇인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두바이를 탐구하며 지내길 바란 나이지만, 오히려 두바이에서 나는, 나를 더 탐구하는 시간을 존중받을 수 있었다. 김밥 하나는 정말 제대로 쌀 수 있다는 건 이제 완전히 알았다.

그 생활이 행복했는가를 묻는다면, 여전히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정답이 없다는 것 역시 두바이스러운 것이니, 두바이를 충분히 향유한 나의 삶이라고, 나 스스로를 두둔해 본다.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또 어떤 변화 앞에 마주 서 있을까? 그 다름 역시 공존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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