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올림픽 출전 국가 리스트도 아니고, 새로 바뀐 둘째 아이의 반 친구들의 국적이다. 커서 올림픽에서 만나자는 이야기가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양궁에서 만나자고 농담 한마디를 던진다.
이렇게 아이들의 국적이 다양한 지구마을 두바이에 살고 있으니, 나의 친구들, 그러니까 아이들 엄마의 국적도 다양하다. 학교 외에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곳이 많지 않으니, 아이들 친구의 엄마가 곧 나의 친구가 되었다.
외국인들과 친구라니, 어려운 일 같지만 두바이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국에 가족과 친구를 두고 온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몇 번의 인사를 하다 보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키마라, 샤샤, 칼라, 와즈다, 로지
Khimara, Sasha, Carla, Wazda, Rosie
내 핸드폰에 이런 이름들이 저장될 줄이야! 평생 외국인 친구 한 명 있는 게 나의 버킷 리스트였는데, 외로운 두바이에서 그 꿈을 이뤘다.
그리고 오늘은 나의 독일인 친구, '칼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 만난 날, 난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아이들 반 배정이 끝난 첫 주 금요일 아침 8시. 반엄마들의 첫 번째 티모닝이 있었다. 단체 모임은 지양하지만, 그래도 첫 모임이니 가서 커피나 마시자 싶어 참석했다.
어디에 사는지, 애들 방과 후에는 뭐 하냐, 어디 집값이 오르는지 등등 영어만 아니라면 한국에서의 엄마들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 속에, 또 나의 영어 듣기 평가는 시작되었고, 언제쯤 일어나야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불현듯 1시 방향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금발머리, 그리고 바다같이 파란 눈, 러시안인가 싶었던 한 여자가 나를 굉장히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늘 난 작고, 말수 적은 동양인이니 또 그렇게 보나보다 싶었는데, 느낌이 좀 달랐다.
그녀의 이름 칼라. 이곳에서 거의 못 만나본 독일인이다.
그녀가 나를 보는 눈이 호기심 가득히 반짝반짝 빛났다. 한국인을 처음 보는 건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었다. 자리가 멀어 몇 마디 얘기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녀와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그 이후에도 하원 시간이면, 그녀는 너무나 인자한 미소로 늘 내게 다가왔다.'아.. 오늘은 영어 하기 싫은 날인데.' 하며 슬슬 피하기도 했지만, 늘 피부며, 옷이며, 액세서리며, 집에서 막 튀어나온 나의 패션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인사말에 기분은 좋았다. 그래도 외국인과의 대화는 늘 긴장이 된다.
그러다 며칠 뒤. 역시, 그녀에게 본론은 따로 있었다.
하원 때 만난 그녀는, 새하얀 얼굴이 정말 새빨개질 정도로 붉어지더니, 나에게 물었다.
"혹시 마이 데몬 봤니?"
마이 데몬? 당시 나온 지 며칠도 되지 않은 송강과 김유정 주연의 그 한국 드라마 말인가? 아! 한국 드라마 팬이었구나. 그제야 그동안 그녀의 눈빛이 이해가 된다. 본인이 좋아하던 드라마 배우들과 같은 머리색에, 비슷한 옷을 입은 한국 사람을 봤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나보다 키는 한 15cm 더 큰, 영어도 완벽한 독일 여자가 이 얘기 한번 하려고 그렇게 쑥스러워하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던 것인가?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싶어 웃음이 났다.
그 이후에도 사랑의 불시착에 나온 남자 배우는 피부가 너무 좋다며, 한국 남자들은 다 그렇게 피부가 좋은지, 매일 식사를 드라마처럼 하는지, 왜 한국 드라마에서는 엄마들이 이름이 아닌 '누구 엄마'라고 서로 부르는지 등, 그녀는 그동안 궁금했던 한국의 모든 것을 나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추천하는 나에게, 단 2회만 보고도,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소재는 같지만, 방향성이 다른 것 같다고 그녀는 답을 했다. 두바이에서, 한국 드라마의 맥락을 이해하는 독일인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건조했던 사막나라에서 새로운 재미 하나를 찾았다.
또 늘 여기서는 모르는 거 투성이에 질문밖에 할 게 없던 내가, 거꾸로 알려주는 입장이 되어보니, 헛헛했던 두바이 생활에 나도 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국 드라마덕을 두바이에서 본다.
두바이에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독일인 친구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되다니. 이 또한 두바이스러운 인연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를 '벤지 엄마'라고 부르며, 그녀는 한국의 많은 것들을 묻고, 나는 두바이와 독일에 대해 묻고 답하고, 독일 빵집에 들러 함께 라우겐을 사고, 한식당에 가서 된장찌개와 김치를 나눠먹는 지구마을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난 그녀의 집에서 발견한 허브맛 솔트를 보며, 전생이 있다면 분명 그녀는 한국에 살았을 거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