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생일은 두바이 온 지 3일째 되는 날. 아이들 첫 등교날이자 한국에서 이삿짐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학교에 간지 얼마되지 않아 둘째 아이가 잠들었다고, 일찍 데려가라는 선생님의 연락을 받아 가야 했던 그날이다. 세월아 네월아 하며 천천히 일하는 이곳 사람들의 특성상, 이삿짐 정리는 해가 질 때까지 끝날 줄 몰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발주머니에 하나씩 싸뒀던 신발들이 아이방 책장에 한 칸씩 들어가 있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지, 내 한계를 시험하는 날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남편이 저녁이라도 나가서 맛있는 걸 먹자 했지만 나의 에너지가 바닥이었다. 이곳의 배달음식도 한국 못지않게 다양하고 편리하지만, 그날엔 시켜 먹고 싶지도 않아 햇반에 스팸, 계란프라이, 그리고 김치로 저녁을 때웠다. 아이들은 뭘 먹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역국은 먹었냐는 엄마의 문자에 목이 메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오늘.
생일이다! 하고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이제는 좀 여유를 찾은 듯하다. 여전히 매일의 크고 작은 일로 하루하루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혼자 이 시간을 기념하고 싶었다. 스스로 생일을, 그리고 어찌 되었든 두바이에서의 1년을 무사히 보낸, 나의 오늘을 자축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교실에 넣고 나니, 아침 7시 50분.
매일 아침 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아랍에미리트 국가를 배경음악 삼아, 힘차게 조금 특별한 곳으로 출발했다. 한국 사람답게, 이곳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내비게이션에 주소 이름을 쳤다.
Brew Cafe, Jumeirah road, 13km, 28분.
약 1년 전,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간 주재원 친구의 추천으로 이 카페에 왔다. 특별히 유명한 카페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여기를 가고 싶었다. 그날은 첫째 아이의 첫 번째 반단체 플레이 데이트에서 아이도, 나도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펑펑 울고 돌아온 토요일의 다음날이었다.
그날,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래 그냥 우리 넷이만 놀자. 여기 사람들, 외국 엄마들 다 싫다.' 하고 생각했다. 옆에 앉았던, 중동 전통옷인 아바야를 입고 여유 있어 보이는 여자들도, 하얀 칸도라를 입고 커피 한잔에 담소를 나누는 남자들도 불편했다. 정말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뚝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유난히 파랬던 하늘의 구름만 봐도, 커피를 한 모금만 마셔도 눈물이 떨어졌다. 뭔가 긴장 풀고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한국으로, 나의 터전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날은카페 분위기며, 맛이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에미라티라고 불리는 아랍에미리트 현지인들이 많이 좋아하는 카페라고 추천을 받은 건데, 커피 가격이 비쌌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제 두바이의 해 질 녘 아름다운 핑크 하늘이, 흐트러지는 재스민 꽃향기가, 어디서든 피부색, 머리색에 상관없이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다니는 우리 아이들의 자유로움이, 그리고 국적은 다르지만, 허둥지둥 적응하는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친구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 에미라티들의 사적인 공간이 다시 궁금해졌다.
막히는 63번 움 스퀘인 도로 Umm suqeim street를 지나, 해안가 동네답게 부유한 에미라티들이 많이 거주하는 주메이라 로드 Jumeirah road로 들어섰다.
주메이라 Jumeirah.
어디 회사나 사람 이름인가 했는데, 아랍어로 해변가에 파도가 칠 때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 단어로, Beautiful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하얀 모래사장길을 따라 고급 주택과 우리에게도 친숙한 7성급 호텔 부르즈 알 아랍 같은 호텔들이 지어졌고, 카페, 뷰티살롱, 레스토랑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두바이의 예쁜 면이 다 모여있는 곳이다.
주메이라 로드
그리고 브루 카페는, 이 도로옆에 위치한, 이곳 동네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작은 커피가게다. 카페에는 역시나 오늘도 아바야와 칸도라를 입은 에미라티들 뿐이다. 만약 알라딘과 자스민이 21세기에 있었다면, 결혼 후, 아침 커피를 한잔 마시러 올 법한 분위기다.
평일 아침 9시, 이들은 무슨 일을 하길래 이 시간에 한가로이 커피 모닝을 즐길 수 있을까? 하필 오늘 한국에서 사 온 진한 하늘색 스트라이프 니트를 입은 내가 그들의 무채색룩 속에 유독 튀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들어오든지 말든지, 소리도 안 들리는지 이 작은 카페에서 각자의 대화에, 통화에, 혹은 커피에 집중한다.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 펜더처럼 마치 나만 다른 세상 속으로 온 듯, 아니면 내가 해리포터의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듯, 나만이 생경함을 느끼고, 그들은 이상할 것 하나 없다는 듯 무심하게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야 이들의 여유가 보인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일 일상에서 잊고 있던 중동의, 두바이의 이국적인 향기를 느꼈다. 마치 타임머신, 아니 평행 우주로 초대된 느낌처럼 기분이 묘했다.
워낙 넓지 않은 공간이라 호기롭게 말 한마디라도 걸고 싶었지만, 타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 또한 서로의 자유를 배려하는 두바이의 암묵적인 룰이니, 나 또한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나의 생일을, 이곳의 시그니쳐 음료인 주메이라 라테를 마시며 혼자 두바이에서 1년을 자축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Happy Birthday to me.
그리고 스타벅스 커피값의 2배 가격이 나온 걸 보고, 다시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우습지만 커피맛은 이번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만약 이곳 손님들이, 전통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이 카페가 어디 LA 비벌리힐즈의 로드카페인지, 런던 해안가 마을에 동네 사람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카페인지 알 길이 없었다. 원두는 베를린 원두를 쓰고, 호주식 커피 메뉴를 파는 곳이 에미라티들의 사랑방 카페라니.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두바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두바이에서는 모든 것이 공존한다.두바이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에 흡수되거나, 현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들을 그대로 지키며, 이곳에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나 생활을 취미처럼 즐기며 살아간다. 참 신기하다. 마치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에 와서 자유이용권을 끊고 호주, 런던, 일본 마을을 돌아다니며 본인의 취향에 맞는 것들을 즐긴 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부에서 오는 여유인지, 본인들의 기준과 신념이 명확한 데서 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아마 다른 중동 국가와 다른 두바이의 차별점이자, 두바이 인구가 작년 1년 동안에만 10%나 증가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취미로 즐기는 에미라티들처럼, 나 역시 두바이라는 한시적 테마파크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움은 무엇인지, 잊고 있던 나로서의 취향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경험하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두바이의 가장 큰 매력이자 나를 위한 숙제일 것이다.
자유이용권을 끊었으니 뭐 하나라도 더 타야 이득이 아니겠는가? 겁은 좀 더 덜어내고, 부단히 이 지구마을을 누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