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코플라즈마라는 아주 독한 폐렴을 한국에서도 어린 친구들이 많이 걸린다는데, 이곳에서 우리도 피해 가지 못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우리나라 옛말로는, 평균 온도 35도의 두바이의 가을 감기를 설명할 수 없다.
열이 계속 떨어지지 않는 둘째가 자는 동안,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요즘 부쩍 큰 느낌이었는데, 자는 모습은 여전히 아가 같아 본능적으로 뺨을 아이볼에 가져다 댔다.
어?
사라졌다. 모짜렐라 치즈 같던 우리 아가의 볼살이. 순간 흠칫 놀라 아이의 뺨을 만졌다. 늘 말랑했던 아이의 뒤꿈치가 단단해진 그날의 느낌처럼, 볼이 꽤 단단해졌다.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이곳이 두바이든 한국이든.
한국에서야 유치원 1년 차의 나이이지만, 두바이 영국 국제학교에서는 유치원도 졸업하고 1학년이 된 다섯 살 둘째. 워낙 승부욕이 있는 아이라, 본인이 굉장히 큰 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버렸다.
새로운 나라에서 나의 맘이 힘들다는 이유로 몸만 붙어있었지, 맘은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두바이의 시간 동안, 하얗고 동그란 볼살을 가진 우리 집 막내는 단단해진 볼살만큼 자라나고 있었다.
좀 더 예민하다고 생각한 큰 아이의 감정을 챙기느라, 무던하다고 생각한 둘째까지는 내 손이 닿지 못했다. 불현듯 그 빈 시간이 느껴져 미안함, 서운함, 아쉬움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느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가 돌 무렵 원인불명의 열이 심하게 나서, 응급실을 다녀오던 그날이 떠올랐다. 아기띠에 아기를 안고 오던 새벽녘의 시간에, 링거를 맞고 곤히 아기띠에서 잠든 딸을 보며, 워낙 순해서 손이 가지 않았던 아이라, 아픈 것도 소홀했던 내 탓 같고, 주사도 잘 견뎌낸 아이가 ' 많이 컸네.'하고 대견했던 그날의 그 느낌이, 두바이의 2층집 아이방에서 다시금 들었다.
아이들도 분명 말할 수 없는 힘듦이 두바이에서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둘째는, 이제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아랍어를 읽고 말하며, 영어 필기체로 수려하게 편지를 쓴다. 그동안 이 어린아이의 시간 속에도 많은 일이 있었겠지. 두바이에 와서 아이가 백일동안 울었던 일화는 우리 집에서도, 또 이 학교에 새로 와서 걱정이 많은 다른 엄마들 사이에서도 꽤 좋은 대화 소재가 되고 있다. 나야 길어야 15분 남짓 외국인들을 만나고,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퇴로가 있었지만, 짧으면 3시간, 길면 6시간 동안 학교 안에서 얼마나 떨렸을까.
아직도 키울 날이 망망대해인데, 마치 다 키운 것처럼 대견함과 안쓰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작은 볼살 하나 때문에.
해외 육아를 시작하면서, 나는 무언가 거창한 일인 것처럼 마음을 조리기도 하고, 또 으스대기도 하고 굉장히 다른 육아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야 이 타지생활의 외로움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육아는 두바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내가 엄마임에는 변함이 없고, 늘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지만, 또 아이가 빨리 크는 건 싫은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놀라서 남편에게 아이의 볼살이 달라졌다고 하는 나에게, 남편은 여전히 볼살이 많다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 그건 엄마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일 것이다. 갓 태어나 분만실에서 닿은 그 아이의 살 느낌부터, 졸릴때마다 품에 안겨 볼을 비벼대던 그 순간순간의 느낌을 엄마는 잊지 못한다.
이제 더 단단해질 날 뿐이겠지. 늘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세며, 두바이의 시간은 늘 느리다고 생각했다. 느린 시간의 장점이 있었네. 두바이의 느린 시간만큼 조금만 천천히 크자, 나의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