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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Oct 01. 2023

너의 소리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새벽녘이면 잠결에 들리던 소리들이 있다.  

소리들은 동트기 전부터 시작된다. 


고양이들에겐 나름의 규칙적인 하루 루틴이 있는데, 그것을 알려주는 게 소리다.

쵹쵹쵹쵹, 잠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소리,

오독오독, 사료 먹는 소리,

챱챱챱챱, 물 먹는 소리,

조르르륵, 제 화장실에 가서 모래 위에 오줌 누는 소리,

박박박박, 모래 덮는 소리,

파다다닥, 용변 보자마자 뛰쳐나와 뜀박질하는 소리,

트득트득, 스크래처 긁는 소리,

투닥투닥, 뭔가를 가지고 노는 소리,

그리고

왜애애액, 보리를 귀찮아하던 애기가 보리에게 하악질 하던 소리.


이 소리들이 잠잠해졌다는 건 새벽 일과를 마치고 다시 잠들었다는 뜻이다. 


알 수 있었다. 잠결에 이 소리들을 들은 날이든, 깊이 잠들어 못 들은 날이든,

내 곁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고양이가 두 마리에서 한 마리가 되었을 때 새벽의 이 소리들도 절반으로 줄었으나,  

그럼에도 보리는 지난 5년 동안 혼자서, 규칙적인 많은 소리들로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보리는 새벽이면 우다다다 뛰어다니거나 뽀시락거리며 저 혼자서도 야무지게 잘 놀았다.   

뭔가를 사냥(?)한 날엔 자기가 포획(?)한 전리품을 밥그릇에 물어다 놓고 유난히 의기양양한 소리를 내며 오독오독 사료를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릇 안에 쇼핑백 끈이나 고무줄 같은 것이 들어있곤 했다.

 

네가 자연의 삶을 살았더라면, 나는 걸핏하면 뱀이며 벌레 조각 같은 것들을 선사받았겠구나.  

보리가 갖다 놔둔 고무줄은, 생명이자 생기였다.   


2022. 12월.




올해 초부터 새벽의 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을 지나며 보리는 식욕이 줄었고, 구토 횟수가 늘었다. 체중이 줄었고, 병원에 자주 갔다. 금세 싫증 내는 사료와 간식이 많아져, 찬장에 쟁여둔 사료가 브랜드별로 많아지고 다 먹지 못해 버리는 간식들도 많아졌다. 밤 사이에 물 말고는 사료를 통 먹지 않은 채 늦잠 자는 날들이 늘었다. 품 안에 그들먹하던 단단한 몸뚱이는 가볍고 말랑말랑해졌다. 사료 그릇에 아무런 전리품도 담겨 있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식욕촉진제와 위장관 영양제를 먹이면서 구토 횟수가 줄고 예쁜 맛동산 모양의 응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가끔씩 새벽에 예전의 소리들이 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작년까지 매일 새벽마다 들리던 그 생기 넘치는 소리들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임을.   


2023. 6월, 9월.




소리들이 들리지 않은 새벽.

오늘도 보리는 내내 잠만 잔 모양이구나,라는 걸 의식하자마자,

이제부터 수위가 깊어질 일만 남은 슬픔의 강바닥에서 눈을 뜬 사람처럼, 

나는 한없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소란스런 소리들 대신 보리에겐 새로운 루틴도 생겼다. 

내가 잠자리에 누워있을 때 쵹쵹쵹쵹 다가와 해애애앵, 어리광 뚝뚝 묻은 목소리로 칭얼거리다

내 품 안에 벌러덩 누워 내 얼굴 쪽에 궁둥이를 들이밀고 고릉거리며 잠드는 것.  

작년 여름쯤 처음 생긴 루틴이다. 

손바닥으로 궁둥이를 토닥토닥해주다 함께 잠이 들 때면,

슬픔의 강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나는 다시 따뜻한 시냇가로 기어 나와 한숨 돌리는 기분이 든다.   


2023. 6월. 


14년 전 이맘때쯤 태어난, 내겐 14년째 아기인 영원한 내 막둥이.  

언젠가 이 아이가 적막 속에 나를 홀로 남겨두고 떠날 것을 안다. 

하지만 하루만, 한 달만, 1년만, 2년만.... 조금만 더 소리를 들려주렴. 


"문득 이 평화를 잃어버릴 마음의 준비를 해 본다

...

오늘 같은 내일, 그건 더없는 행복"

<'산책'(노래:양희은, 작사:박창학, 작곡:이상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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