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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Nov 26. 2023

현재의 시간들이 다른 이름으로 명명될지라도

시한부라고 생각하지 않기 

2023년 11월. 보리가 처음 내게 온 지 14년이 되었다. 

까칠한 누나 고양이 '애기'가 있는 집의 막둥이로 9년, 

'애기'가 떠난 후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 외동 고양이로 5년째. 

어느덧 노묘가 된 보리는 때론 너무 점잖아졌으면서도 때론 아직도 너무 아가 같다. 


보리가 막둥이이던 시절 집안의 서열 1위는 애기였는데, 마음의 상처가 많고 극도로 예민한 애기가 어리고 혈기왕성한 보리를 귀찮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많이 속상했다. 

그건 분명 인간인 나의 잘못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합사 과정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애기는 외둥이로 6년을 살았지만 그 6년 동안 집사의 불안정한 삶과 잦은 거주지 이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겨우 안정이 되나 싶던 때에 웬 삐약거리는 냄새나는 작은 털뭉치가 애기의 영역을 침범한 셈인데, 

당시 살던 집이 원룸이라 공간 분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양잇과 영역동물들을 합사 시킬 때 단계별로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것이다. 보호자인 인간의 무지와 가난 때문에.


애기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침입자인 보리와 친해지는 일은 그 후로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보리는 몸집이 커지면서 계속해서 애기에게 장난을 걸며 다가갔지만 돌아오는 건 애기의 하악질뿐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애기를 먼저 살피고 안아준 후, 보리를 애기에게서 떼어내고 따로 놀아주느라 늘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2023. 11월.


애기가 있던 시절 보리는 한 번도 내 무릎 위에 있어보지 못했다. 내 무릎은 애기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애기가 내 품 안에서 꾹꾹이를 하는 동안, 등 뒤에서 보리가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애기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시절도 끝이 났다. 보리의 시대(?)가 도래하고서야 비로소 온전히 보리에게 사랑을 흠뻑 쏟아주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 무릎이 온전히 제 차지가 되었을 때,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좋아서 그릉거리던 것을 기억한다.


2023. 10월.



둘 이상의 생명체를 거두는 인간으로서 나는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랐는지 모른다. 두 고양이와 살았던 그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내 삶의 여름이 그때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너무도 부족하고 모자란 보호자였다. 애기에게도, 보리에게도.  

  

예전의 미안한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행여 애기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눈치 보며 하지 못했던 사랑의 표현들을 지금은 보리에게 마음껏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훗날 많이 후회하게 될 것임을.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기록들과 지금의 사진들은 가까운 어느 날부턴 '보리가 떠나기 N일 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명명될 것임을.   


(너의 죄를 사하노라?)




나의 예기애도의 시간들은 무섭고, 슬프다. 현재의 시간들이 참 잔인하게 느껴진다. 이 보송보송 아기아기한 생명체를 어떻게 떠내 보내나. 내 삶은 어찌하여 슬픔의 강이 늘 범람하나.   


하지만 너무나 예쁘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지금의 시간들. 

시한부라고 이름 붙이기엔 생명으로 찰랑찰랑한 나날들. 

나의 늙은 아기가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시간들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다시 꽉 안아본다.   


2023.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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