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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Aug 01. 2023

여전히, 두 마리의 고양이'들'과 삽니다

내 반려동물은 나를 떠난 적이 없다 

5년 전, 두 마리 고양이들의 집사에서 한 마리 고양이의 집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주변 지인들이나,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 중에는

'고양이들 잘 있냐'라거나 '고양이들과 잘 보내'와 같이 

무심코 복수형 어휘를 써서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반려동물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상대방이 한 마리를 키우든 여러 마리를 키우든,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처음엔 흠칫했었다. 상실감이 확 다가와서.

굳이 정정해 줄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이제 '고양이들'이 아니고 '고양이'라고. 


그런데 차차 생각을 해봤다. 

굳이 정정해야 할까.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떠난 고양이 '애기'와, 함께 살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억압한 감정들과 홀로 삭힌 시간들로 인해, 나의 첫 펫로스 증후군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1년 가까이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사람들과 소통한 계기가 아니었다면

5년이라는 시간도 '약'이 되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계기'들을 만들고자 했고, 기회들이 나를 찾아왔다.  

5년째 되는 올해 봄에는 애기가 떠난 후 냄새도 맡지 못했던, 애기가 가장 좋아한 참외를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울지 않고.

이제야 비로소 시간이라는 약의 약효가 유효해지기 시작한다. 


2023. 5월. 달콤한 참외 속을 잘 발라 애기에게 주었다. 남김없이 다 먹었을 텐데.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펫로스로 인한 심리적 고통의 강도가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시점이

약 5년이더라는 최근 국내 연구 결과가 내 경우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두 마리 이상의 반려동물과 함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이 세상 그 어떤 동물도 같은 개체는 없다는 것을. 


애기와 보리도 그렇다. 

어느 하나 비슷한 구석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기분 좋을 때 그릉거리며 허공에 잼잼을 하듯이 꾹꾹이를 하는 보리를 볼 때마다,

내 무릎 위에서 내 배를 누르며 꾹꾹이를 하던 애기의 몸뚱이와 그 촉감이 떠오른다.


간식을 먹을 때마다 그릇 주변 바닥에 사방팔방 찌꺼기를 흘리는 아직도 아가냥이 같은 보리를 볼 때마다,

언제나 바닥에 알갱이 한 톨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음식을 먹던 야무진 애기가 떠오른다.


참외를 깎을 때 무관심한 등 뒤에 보리를 의식할 때,

벌써 발 밑에 와서 냐냐거렸을 애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정강이에 힘주어 스윽 문지르는 보드라운 털 결이 느껴진다.


이부자리에 올라오면 다짜고짜 내 얼굴에 궁둥이부터 들이대고 눕는 보리를 보면,

애기 같았으면 내 팔을 베개 삼아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꾹꾹이를 했을 텐데 싶다.


이불 밑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 보리를 보며,

매트리스와 이불 사이 틈새를 파고들어 가 동그란 굴을 만들던 애기를 떠올린다. 


서너 달마다 검진을 위해 보리를 병원에 데리고 갈 때마다,

떠나기 전 노령의 애기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때도 이렇게 케어를 했어야 했는데.   


병원 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와아앙 와아앙!' 우렁차게 울어대는 보리를 보면서,

우리 애기는 무서울수록 입을 꼭 닫고 있었지, 무수한 옛 기억들이 소환된다. 


식빵도 다르게 굽는 애기와 보리 


식빵 굽는 자세를 취할 때 꼭 기다란 왼쪽 앞발을 쭉 내밀고 앉는 보리를 보면서,

애기는 양손을 동그랗게 몸 밑에 집어넣어 완벽한 식빵을 만들었더랬지, 한다. 


빗질을 해줄 때 아직도 어설프게 고개를 버둥거리는 아가 같은 보리를 보며,

애기는 이럴 때 마치 주인이 하인에게 몸을 내맡기며 '어디 한 번 잘해보거라' 하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차악 젖혀 턱 아래를 빗질하게 해 주었지, 하고 미소를 짓게 된다. 


보리에게서는 전혀 구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애기 혓바닥. 애기는 그 작은 까끌까끌한 혀로 내 손을 싸악 싸악 따가울 때까지 자주 핥아줬었다. 

서열이 높은 고양이가 낮은 고양이에게 해준다는 그루밍.  

애기는 늘 나를 핥아주었고, 보리는 늘 내 손길을 바라지만 자기가 나를 핥아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서열관계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보리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발라당 누웠을 때 배를 문질러주면 보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좋다고 그릉거린다. 

초음파를 보느라 배의 털을 밀고 온 날이면, 분홍색의 따뜻한 벨벳 같은 보리 뱃살을 문지르는 것이 나의 작은 천국이다.

애기에겐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애기 같았으면 배 쪽에 조금만 신경이 거슬려도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고 내 손을 콱 물었을 것이다. 


2023. 7월.


나의 아가야.

엄마는 하나도 잊지 않았어. 하나도 잊을 수가 없어. 

네가 곁에 없어도 너는 내 안에 살고 있어. 내가 숨 쉬는 한.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두 마리의 고양이들과 살고 있다.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2017.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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