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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May 30. 2023

명멸하다

나이 들었지만 늙지 않았다

오래전 어느 전시회에서 모네의 그림을 봤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전시 관람을 할 때 전시장을 최소 두 번 도는데, 한 번은 사전지식 없이 직관만으로 작품을 보고, 또 한 번은 도슨트의 설명 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사전지식을 갖추고 작품을 본다. 

모르고 봐도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알고 봐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봤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감각을 선사하는 예술작품이 있다. 

내겐 그 그림이 그런 작품 중 하나였다. 

 

The Red Kerchief : Portrait of Mrs. Monet 1868-78


작가 이름과 작품명도 보기 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춰졌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시공간이 멈췄다. 

북적북적한 전시장 안에서 오롯이 이 그림과 나만 존재했다.

이유도 모르게 몹시 마음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마치 스탕달 신드롬처럼, 꼼짝도 못 한 채 그림 앞에 멈춰 선 상태로 몇 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에 힘이 풀려 근처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던 것 같다. 


2006.12.22.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품 전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모네의 그림 앞에서다.  




명멸하는 생명 같은 붉은빛의 망토를 두른 여인이 어딘가 길을 나서다 문 안쪽의 누군가를 잠시 돌아본다.

찰나를 포착한 그림의 내용은 꽤 단순하고 일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겐 이별과 죽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그림이 모네의 작품이고, 모네가 자신의 첫 번째 아내 카미유를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관람 후에 알게 되었다.  

카미유는 모네의 여러 걸작들에 모델로 등장한 여인이자, 모네가 몹시 사랑한 여인이다.  

고생하던 시절 뮤즈가 되어주고 뒷바라지를 하고 두 아이를 낳고 모네 집안의 반대 때문에 결혼도 한참 후에 했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 몇 년 후 서른둘의 젊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모네는 그녀의 임종의 순간까지 그림에 담았다.


이러한 스토리를 전혀 모르고 봤을 때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시선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촛불처럼 어느 한순간 꺼져갈 것이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그리고 펫로스를 경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생명의 유한함에 천착한다.  

저 그림을 본 순간 이유도 모르게 몹시 슬펐던 것처럼,   

단순하고 반짝이는 일상의 어떤 순간들에 종종 가슴이 미어지곤 한다. 


곤히 잠자는 내 고양이 보리의 꼭 감은 눈과, 

잠결에 문득 들리는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털결,

빤히 바라보는 한없이 선량한 윤기 있는 눈동자와 어리광이 뚝뚝 묻어나는 아기 목소리.


언젠가 이 모든 게 신기루가 된다는 걸,

경험했기에 더 안다. 이 순간들은, 촛불처럼 꺼져버릴 거야. 


생이 유한하기에 지금의 삶이 소중한 것이라는 클리셰적인 말은, 때로 인간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소중한 건 맞지만, 그럼에도 슬프지 아니한가.

명멸하는 생명들이. 영영 헤어질 운명들이.  


2022. 4월.


12살의 보리와 13살의 보리는 많이 다르다.

보리는 1년 전에 비해 몸무게가 무려 1kg이 줄었다. 

궁디팡팡 손맛 찰지던 듬직한 근육이 많이 빠져 몸뚱이가 말랑말랑해졌다.

윤기 나던 털결은 푸석해지고 털이 많이 빠진다. 

구토 횟수가 늘고 먹는 양은 줄고 입맛은 까다로워져, 집사로 하여금 또 새로운 사료와 간식을 폭풍검색하게 만든다.  

병원 가는 횟수는 늘고, 알약 급여를 1초 만에 할 수 있는 능력치가 생겼다. 


보리의 컨디션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어느 날엔 사정없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 주저앉은 듯 창자가 저릿저릿하다. 

어느 날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아기 같이 천진하고 무탈한 보리 모습에 온 세상이 환해진다.


나이 든 반려동물과 사는 건 

마치 작은 촛불 하나 들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닷가 절벽길을 혼자 걷는 것 같다.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면서.


그럼에도 오늘은 바람이 잔잔하고, 너는 반짝인다.

그거면 되었다. 


    

2023.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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