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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듬 Jul 20. 2023

셀프 제모의 시작

일회용 면도기


몸이 고슴도치가 되기 전에 빠른 제모가 필요했다. 엄마가 사주신 슈가링 제모는 효과가 탁월했지만, 큰 고통 때문에 다시 사용하진 않았다. 따라서 아픔이 덜한 제모 방법을 찾았고, 아빠가 쓰던 전기면도기에 눈이 갔다.


아빠는 화장실에 전기면도기를 충전해 두고 매일 아침 사용했는데 아침에 아빠의 면도기 소리에 깰 정도로 소리가 요란했다. 저런 전기 도구를 턱에 대고 윙윙 사용하는 게 무서웠지만, 아빠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면도하는 것을 보니 통증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저걸로 팔, 다리털을 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빠가 없을 때 몰래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집에 아무도 없던 어느 날, 화장실 문을 닫고 충전된 전기면도기를 들어 올렸다. 면도기는 꽤나 묵직했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위이잉~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3개의 동그란 날이 빠르게 움직였다. 화장실을 가득 매운 진동 소리에 깜짝 놀라 전원을 끄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가 매일 얼굴에 사용하는 면도기를 내 팔과 다리에 써도 될까? 살짝 죄책감이 몰려와서 손등에만 살짝 대보기로 했다. 다시 전원을 켜고 면도기를 손등에 대니 날이 살짝 눌리면서 털이 깎이는 소리가 났다. 우려와는 다르게 아프진 않았고 살짝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깔끔하진 않았지만, 길었던 털이 잘리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아빠 면도기로 제모한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혼이 날 것 같아 전기면도기는 쓰지 않기로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충전을 해 두었다. 그리고 화장실 수납장을 열어 쓸만한 것이 없나 살폈다. 치실, 일회용품 샴푸, 비누, 엄마의 생리용품 등 다양한 용품이 테트리스 하듯 쌓여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하얀색 일회용 면도기가 보였다. 누구의 것인진 알 수 없었으나 그것으로 팔다리 털을 밀어 보기로 했다.


털이 난 결 반대방향으로 날을 슥슥 움직이니 털이 점점 짧아졌다. 잘린 털 때문에 피부가 거칠 거리 긴 했지만, 티가 잘 안 날 정도로 잘리는 것을 보고 매우 만족했다. 그런데 몇 번 사용하니 면도기 날에 털이 끼면서 제대로 잘리지 않았다. 날에 끼인 털을 빼다가 피를 보기도 했지만, 털을 뽑는 고통에 비하면 괜찮았다.


초등학생 때는 그 면도기가 일회용인 것을 모르고 여러 번을 쓰다 보니 녹이 슨 채로 쓰기고 했다. 파상풍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모를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어려서 부모님이 제모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내가 직접 면도기를 사는 것도 부끄러웠기 때문에 새로운 일회용 면도기가 생기길 기다렸다. 이후에는 부모님이 내가 제모를 하는 것을 알고 여러 개를 구비해 두어 녹이 슬면 바로바로 버리곤 했다.


일회용 면도기는 중학생이 된 나에겐 없어선 안될 제품이었다. 매일 무릎까지 오는 교복치마를 입고, 2차 성징으로 인해 자라는 겨드랑이 털이 교복사이로 삐져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잦은 제모는 필수였다. 또 중,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었기 때문에 털관리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야간자율 학습이 끝나고 학원에 갔다 오면 밤 12시가 넘어 피곤한 상황에서도 제모를 했다. 일회용 면도기로 제모를 할 경우엔 더욱 빨리 자라기 때문에 2~3일에 한 번꼴로 제모를 해야 해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피곤한 마음에 빠르게 슥슥 제모를 하거나, 마른 피부에 면도기를 쓰면 피부가 베이기 일쑤였다. 겨드랑이나 무릎 같이 굴곡이 있고 살이 접히는 부위는 더욱 신경 써서 해야 했다. 겨드랑이 털을 밀기 위해선 팔을 계속 들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팔이 저리고 더운 화장실에서 털과 씨름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다. 털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것인지 내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면도기 광고에서 얼굴에 쉐이빙 폼을 바르고 면도하는 장면을 보고 비누칠을 하며 제모를 해보기로 했다. 몸에 충분이 비누칠을 하니 면도날이 부드럽게 미끄러졌고 베이는 횟수도 확실히 줄었다. 샤워와 제모를 한 번에 하면서 시간을 단축시키긴 했지만, 일회용 면도기로 제모를 하면 털이 더 빠르고, 두껍게 자라면서 제모를 멈출 수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했던 일회용 면도기.

시간이 지나 여성용 면도기가 따로 나오면서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지만,  


일회용 면도기를 만나고 벗어날 수 없는 셀프 제모의 굴레에 빠졌다.





종류 : 일회용 면도기

제모 난이도 : ★★★ *겨드랑이 무릎 등 접히고 굴곡진 피부를 제모할 때 베이지 않는 기술 필요

통증 : ★★★ *베이면 따가움 주의

장점 : 저렴하고, 손쉽게 제모 가능

단점 : 칼날에 베여 상처가 날 수 있음   

주의 : 날이 녹슬므로 재사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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