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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Oct 01. 2023

무엇에 저항하는가

시간을 거슬러

 “우리는 종교적 광기도 과학주의도, 미쳐 날뛰는 돈도, 과도한 평가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이성의 이상들이 내버려졌다는 징후이다. 요컨대 우리는 정치적 참여가 노동과 엄밀함, 깊이 있는 지식과 같이 가야 한다는 확신을 공유한다.”     


 알랭 바디우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대담 형식인 이 책 서문이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문제의식이 한국사회에서는 먼 미래에나 가능할 듯 요원하다. 2011년 라캉 서거 30주기를 기념하며 나눈 ‘라캉 30년 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본에 의해 인간이 수장당하는 현실이란 세계가 2041년 세계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있기를 바라본다.     


 라캉에게 ‘주체’는 분할되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알면서도 무지하며, 쪼개어져 있고, 어떤 근본적 타자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즉, 자본주의 속의 주체들이란 쏟아져 나오는 신기한 상품들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일자들이라는 점이다. 소비주의 시대에서 더는 소비자가 주체일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라캉은 철학을 자양분으로 삼았다.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에 견주고, 자신은 레닌에게 견주었다. 그렇기에 라캉의 혁명은 국가적 억압 때문에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하는 것이다. 프랑스 68 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이 보여준 것처럼 사회에 대한 불순응시나 과도한 독창성 때문에 받을 심리적 고통은 정치와 상관없는 치장을 하지만 요인 중 하나였음을 사유한다. “혁명가로서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은 바로 주인이다.” 무엇을 저항하는지를 정확히 정의할 수 있다면 진보적인 행위였다 말한다.     


 라캉은 투쟁적 사회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시사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프랑스의 문화적 삶에 나타난 본질적 움직임들을 포착하는데 소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신분석의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폭력적인 혁명이나 극단적인 행동보다는 상징적인 울타리 역할을 했다고 루디네스코는 말한다.     


 바디우에 의하면 라캉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그 사유의 구성적 모호함에 있다. 부인할 수 없는 보수적 단면들과 극단적 급진성의 요소들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면 ‘해방’이다.     


 최근 발생한 미 대사를 향한 김기종의 테러를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언론이나 정부의 반응은 옳지 않다. 개인의 극단적 행동을 색갈론으로 몰아간다. 라캉의 ‘끝나지 않은 혁명’은 극단적인 행동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는 라캉으로부터 철학을 통해서 정치적 전복을 꾀하는 선동가들의 탐욕일 뿐이다.     


 라캉은 인종주의와 그 변형인 공동체주의, 광적 개인주의, 그리고 특히 선동에 좌우되는 대중의 어리석음, 여론의 지배가 서구 세계의 공포와 종말, 허무주의로 기울 수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에 동반하는 여론의 본질적 역할에 제어 장치가 부재할 경우 대중의 우민화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내포한다고 보았던 토크빌적 측면을 거론했다. 무한한 진보와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는 이념을 믿지 않았다. 현대의 자본주의와 야만적 세계화, 한계를 모르는 금융화, 보편화한 신보수주의 세계라고 바디우는 이 대담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라캉이 끊임없이 여러 철학자를 소환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분야의 논리에 따라 걸러지고 재해석되어 정리할 수 있는 정신이 ‘혁명’이라 생각된다. 라캉은 선호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텍스트 원문에 충실하게 근접해 있고 해석이 대담하며 통합과 배제 사이에서 철저하게 갈등하며 자유롭게 나아갔다. 철학을 자기 학문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정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맞아 위기를 느끼는 개인들의 사유, 그것이 ‘끝나지 않은 혁명’은 아닐까.


 새 학기가 시작되는 지난주, J 대는 2016학년도부터 학과제를 전면 폐지하고 단과대학별로 신입생을 모집해 2학년 2학기 때 전공을 결정하게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재작년과 같이 교수와 학생의 원성이 높아 1인 시위 등이 진행 중이라 했다. 현장 상황이 궁금하다 했더니 J대에 재학 중인 청년이 연락을 해왔다. 지난 금요일 오후였다.     


“J대 학생으로서 미안합니다. 엊그제까지 보이던 피켓과 학생들의 열기가 어제, 오늘이 되더니 갑자기 사그라졌습니다. 다들 무심하고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데 급급한 것이 요즘 J대의 분위기랍니다.”      


 대학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한국사회에서 순수학문이 사라지는 곳이 늘어난다.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대학의 일방적 결정은 주체의 배제이다. 저항은 일시적으로 멈춘다. 주인으로서의 진정한 주체를 부르짖은 라캉의 예측은 현대에 더욱 빛난다.         


 

2015. 08. 22. 알랭 바디우,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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