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자카르타 포로수용소 제1분견소는 수시로 포로들을 착출해 어디론가 이동시켰다. 나는 수백명의 인원을 배를 태워 가까운 수마트라섬의 도로 건설을 위해 이동키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수송선은 말라카 해협을 지나 동부 수마트라에서 섬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수마트라는 섬이라고는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보르네오 다음가는 큰 땅으로 한반도보다 조금 넓은 섬이다. 3천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등뼈를 이루고 있으나 북쪽으로는 끝없는 대평원이 전개된다. 면적에 비해 인구밀도는 낮고 교통망은 미비하다. 반면 자바섬은 비좁고 산이 많은데도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수마트라의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기로 유명하다. 군대의 거동도 호랑이의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 조그마한 수송선은 강의 어귀에 들어섰다. 양편의 육지는 보일듯말듯 바다와 강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넓다. 수면은 거울마냥 반들하고 물이 흐르는 것은 느낄 수 없다. 호수에 뜬 배라고나 할까. 바람은 잔잔하고 평온하기만 하다.
꼬박 하룻밤을 서서히 거슬러 올라가니 양편에 뭍이 가까이 보인다. 인가는 찾아볼 수 없고 빼곡이 우거진 숲이 있을 따름이다. 아주 드물게 가옥 몇채와 배를 대는 발판 같은 것만 보았다. 보트보다 작은 배가 하나 보였다. 고기를 잡고 사는 어부의 것으로 보인다. 썰물과 밀물이 없는 탓일까? 홍수가 없어서일까? 강 양편으론 숲이 가득차 있고 물은 안정된 유속으로 흐른다. 풍부하고도 평온한 자연 상태다.
나무를 오르내리는 원숭이들 무리가 장관이다. 큰 나무를 오르내리는 원숭이들은 ‘낄낄’ 높고 낮은 소리를 내며 서로 쫓아다닌다. 원숭이들도 우리처럼 생존 경쟁에 분주한 모양이다.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눈에 보이는 놈들만 해도 끝이 없다.
정말 여기 수마트라섬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배는 대안(강 건너 언덕기슭을 의미함)의 나무를 손으로 잡을 듯 3일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풍경도 슬슬 단조로워진다. 이곳은 아마존강 유역의 미개척지를 연상했다. 하긴 일본군은 지금 이 기다란 섬의 도로망을 남북으로 완성하고 옆으로 지선을 만들어 교통망을 개척하려 하고 있다. 군사전략상의 목적 이외에도 이 끝없는 정글을 옥토로 바꾸어 비좁은 본국에서 이민을 시키려는 의도도 있다. 게다가 섬의 남쪽 팔렘방은 석유가 보물처럼 쏟아지는 중이다. 이 전쟁에서 낙하산 부대가 유전을 탈취한 것은 초전에 일본군이 심혈을 기울인 작전 중 가장 의미 있는 수확이었다.
배는 깊숙이 들어만 가고 강폭은 점점 좁아진다. 500톤은 더되어 보이는 이 배가 좁은 강에서 돌아설 수 있을까 걱정된다. 내 염려를 알았는지 배는 조금 가다가 멈춘다. 30분쯤 좁은 길을 따라가니 엉성한 수십채의 집들로 보이는 소도시가 나온다. 아니 도시라기보다 하나의 큰 촌락이라고 하는 게 적당하겠다. 정글 속에 있는 외로운 고도라고 할까. 지금 우리의 입장으로 보면 개척의 거점인 것이다.
포로의 생사는 보급에 달렸다!
이곳에서 3백명 쯤 되는 포로를 일본군에게 인도한다. 자원과 물자는 수운으로 운반하고 여러 곳의 거점에 도로를 개설하면 단시일에 섬의 위아래를 관통할 수 있다. 삽과 괭이, 톱과 같은 도구와 포로가 개척에 이용될 것이다. 그러나 유사 이래 톱과 도끼가 들어간 적이 없는 밀림의 거목들은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무뿌리를 제거하고 흙 한 삽 뜨기가 힘이 든다.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다리를 놓아야 한다. 배가 고프면 전쟁을 못한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보급이 문제이다. 수로를 통한 보급은 믿기가 어렵다. 많이 먹어야 일도 잘하는 것인데 앙상한 포로들의 신체로 대체 무얼 얼마나 일을 시킬 것인가? 일이야 일단 부릴 순 있겠지만 이들에게 먹일 주식과 부식물의 공급은 배나 차를 동원해야 한다. 보급물자를 만재한 수많은 배들이 폭탄이나 어뢰를 맞아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상황이 지금의 시국이다. 그럼에도 군부는 전략상 도로망을 깔아야 한다. 포로들은 이 전략을 위해 착취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사는 순조로운 보급에 달렸지만 우리는 그 진실을 외면하고 배를 타고 다시 돌아온다.
귀환로도 원숭이 떼와 독수리들이 캑캑거리는 소리는 여전하다. 대자연의 흐름은 인간사에는 아랑곳없다는 것이겠지. 평화만이 깃든 끝없는 정글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태곳적부터 이어온 동물과 곤충들이 생태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활동으로 인해 수난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발이 달린 것들은 깊숙한 산으로 쫓겨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불태워 지거나 땅에 묻힐 것이다. 그 후엔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새로운 원숭이들이 이곳을 들이닥칠 것이다. 이 동물들은 밀림 속 나무들을 마구 베버리고 먼 곳까지 훤히 보이는 들판으로 만들어버리겠지. 그것이 인간이 말하는 개척인가 보다.
하구를 벗어나 인도양과 태평양의 경계인 말라카 해협에 접어든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엔 큰 배를 기다리기로 한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빌딩인 16층짜리 대동아 극장은 이 도시의 상징인 것 같다. 시간을 내어 극장에서 영화관람을 했지만 끝까지 보진 못했다. 빈대가 마구 쑤셔댔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와 몇 마디 손끝으로 빈대를 눌려죽였는데 손끝은 뻘겋고 남새가 지독하다. 전투와 독가스전을 함께 치른 것 같은 느낌이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나는 건물 아래층 식당에 앉아 먹을 것을 주문한다. 국수 한 그릇만 판다는 안내문을 미처 보지 못했는데 생각할 틈도 없이 국수 한 그릇이 나와서 순식간에 후루록 먹어치운다
해변가의 넓은 도로를 따라가보니 우뚝한 동상이 서있는데 가까이 가보니 야마시타대장(야마시타 토모유키, 태평양전쟁 초기 승전을 거듭한 지휘관)이다. 작은 키에 긴 칼을 차고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길로 박물관에 가보니 영국의 어느 장군이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한 손을 치켜들고 서 있다. 이 동상이 야마시타 대장이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얼마 전에 옮겨온 것이라 한다. 옛적의 영웅도 박물관으로 옮기니 지금은 패장이 된 것 같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영국풍의 주택지가 우리의 숙소가 되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야자나무 그늘 밑에 목조로 된 2층짜리 조그마한 주택들이 높고 낮은 언덕 위아래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늘어서 있다. 나무에는 빈틈없이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나무마룻바닥의 촉감이 경쾌한 느낌이다. 눈 앞의 파란 바다와 대안의 초록색 언덕의 사이를 조그마한 배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간다. 해풍은 선선하게 불어온다. 자바에서나 여기서나 부채는 필요하지 않고 별로 본 일도 없다.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 정도의 바람이 늘 불어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