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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an 12. 2019

일반인을 억류소에 몰아넣다.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불길한 전황

듣자 하니 일선에서의 전투 상황이 유리한 쪽으로 가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이곳에도 가끔 느닷없는 공습경보가 내린다. 어디에 적기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경보가 울리면 아군기가 출동하고 야간에는 서치라이트가 공중을 비추기도 한다. 포로들에 대한 급양도 전보다 암암리에 줄어들었다. 의복 같은 소지품은 그나마 가진 것도 마모되어버리는데 약간의 세탁비누 이외에 새로 공급된 것은 거의 없다. 담배는 수용소 내에 제조 공장이 있어 최하급의 원엽초를 손으로 말아서 배급된다. 포로들 내부에 자체 연극단이 있어 간혹 무대 공연 등을 했었는데 배가 고파서인지 그것도 중지되었다. 다만 밴드부 대원 몇 명이 석양이 되면 뜰에 나와 연습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다. 


간혹 낡은 가방이나 책보 곁에 약간의 소지품을 늘어놓고 소지품 검사를 한다. 검사의 목적은 분실품의 점검이 아니라 흉기 같은 게 있는지 금지품을 살펴보는 것이다. 검사를 해봤자 그것이 그것이기에 대충대충 해치운다. 포로들은 모든 것을 자치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가실 것은 없다. 양동이에 물을 나른다고 하면 일열 횡대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양동이를 이동시킨다. 포로들은 어디서나 군소리 없이 줄지어 서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재촉하거나 꾸짖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가진 능력 그대로를 성실하게 행한다. 현지의 일본어지 ‘자바 신문’은 어느 장성의 담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포로들에게 철모의 갓을 접는 것을 시켰다. 처음에는 하루 70~80개를 다음날에는 100개, 그다음은 130개, 또 150개를 계속했다. 본국이나 만주 등지에서 그런 일을 시켰을 때엔 직공들의 능률은 처음엔 130~140개였지만 그다음부터는 100개 내외를 계속했다. 직공들은 감독자가 보이지 않으면 꾀를 파기 일쑤다. 포로들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볼 때 적국민으로서 마땅히 대적할만한 국민이라고 본다.’라고 말이다. 씁쓸한 이야기다.


신문은 날마다 ‘특공대 적함 적침’, ‘옥쇄’ 등의 기사를 보도했다. 항복, 투항은 일본군에게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전의 참상이 역력히 엿보인다. 인도와 버마 국경의 고투, 태평양 고도의 옥쇄, 본국과 동남아 지역과 보급 장애, 일본 본토에 대한 집요한 공습이 승리를 위협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일반인들의 억류조치 단행

군수뇌들은 적개심의 고취, 적성국민에 대한 억압이 전승에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또 적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억압에 대한 보복조치라고 판단했는지 이곳 적성국민 비전투원에 대해 억류 조치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일정한 거주지역을 지정하고 주변으로 철조망을 두르고 1만 명, 2만 명씩 밀집 거주를 시켰다. 적성국민 10% 이상에서 출발해서 차츰 시일의 경과에 따라 60%, 70%로 확대한다. 10세 이하의 아동, 부녀자들과 남성들은 별도의 억류소에 수감된다. 가옥 하나당 7~8세대 또는 그 이상 가구가 거주해야만 했기에 그들의 거처는 매우 비좁아졌다. 일일이 분배를 받는 공동취사 형태로 식사가 결정되면서 이 곳 포로 생활이나 억류나 큰 차이가 없어져 버렸다. 

여성, 아동들만 별도로 억류했던 자카르타의 Tjideng 캠프 (https://dirkdeklein.net에서 인용)


이들은 일본군이 상륙한 후 남편과 직업을 잃고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고통의 나날을 지새웠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친지를 방문하고 시가지를 돌아 보금자리에 귀가하는 자유 정도는 있었다. 평화가 올 날만을 기대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희망이었는데 이제 설상가상으로 억류소 신세가 된 것이다. 그다음으로 무슨 격변이 몰아닥칠지 누구도 예상하기가 어렵다. 우리처럼 패잔 민족의 서러움이 뼈를 사무칠 것이다. 


일본군 장교와 몇 명의 인원이 포로수용소에서 파견되어 억류소 관리를 한다. 매일 트럭에 실려 오는 쌀 혹은 빵 부식품의 야채류가 그들의 젓줄이다. 어찌 되었던 건강관리를 잘해야만 하고, 끝까지 살아남아야만 부모, 자녀를 상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신인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절실할 것이다. 몇 달이 지내고 1년이 지나는 동안 이들의 체중은 형편없이 줄어들었고 아이들의 건강도 매우 나쁘다. 날마다 노약자, 병든 아이들이 몇 명씩 죽어 나간다. 이제는 시체가 트럭에 실려 정문을 떠나는 것이 일일 행사가 되어버렸다. 대수롭지 않은 병도 의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하니 사망자가 속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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