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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an 12. 2019

수마트라행 포로수송선의 침몰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출발 대기명령

우리 모두의 일상은 단말마(斷末魔)를 코 앞에 둔 삶이다. 내일을 기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저녁 무렵, 포로들의 대표자가 관리소 사무실을 다녀오더니 명단이 적힌 길쭉한 조의를 읽어댄다. 호명된 사람들은 내일 출발할 예정이니 소지품을 준비하고 새벽 2시까지 식사를 마치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행선지와 이동 목적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군대의 이동은 적기 피습을 막기 위해 주로 밤에 행해진다. 새벽이 되어 부두에 나갔는데 배가 선창에 닿아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밖으로 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엔 또 어디일까? 싱가포르행 혹은 태국 해인가? 아니면 어느 이름 모를 섬인가? 


화물선의 적재 칸에 몰아넣어지자마자 더위가 습격한다. 감시병이 칸 안을 들어오려다 찌르는 듯한 각종 냄새에 도망쳐 버린다. 나는 가까스로 이 배가 인근 수마트라섬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고생스러운 선실 생활은 길지 않을 것이다. 하룻밤을 머물자 갑판의 출입이 통제된다. 해상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17세기 해적선이 성행할 무렵 배를 습격해 많은 대포를 나포했는데 귀환하는 중에 다시 배를 점령당하면서 대포를 뺏겼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어뢰에 피격된 포로수송선

정오쯤 되었을까. 천지가 떠나갈 듯 꽝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진동과 함께 배는 온통 아수라장이 된다. 배는 뒤뚱거리며 조금 나아가다가 선수부터 급히 기울기 시작한다. “바다로 뛰어라. 멀리 피해라” 누군가가 외치는 명령이 들린다. 구명통을 챙긴 자, 챙기지 못한 자, 총을 든 자, 들지 않은 자, 구속을 받던 자, 감시를 하던 자, 배위의 고사포를 담당하던 자, 배기관을 담당하던 자, 주방을 보던 자, 운전자, 선장 할 것 없이 전부 바다로 뛰어든다. 이 순간은 상하도 귀천도 없다. 속박자도 피속박자도 없다. 오직 하나의 염원만 있을 뿐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선체는 완전히 가라앉고 흰 물결만이 무섭게 소용돌이친다. 주변으로 크고 작은 물체들이 많이 떠있다. 바다 위에 뛰어든 자들은 지푸라기라도 하나 잡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구명통이 제대로 메어지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끌어내려 어깨 밑에 껴보니 부력으로 인해 고개가 더 올라간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판자 조각 하나라도 붙잡게 되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판자 하나에 많은 사람의 손이 엉겨 붙었고 한두 사람은 그 위로 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커다란 물건 하나에 의존한 채 다닥다닥 붙어있는 많은 머리들이 보인다. 


바다는 잔잔하다. 어렸을 때 헤엄이라도 쳐본 것이 천만다행이다. 고개를 흔들고 손을 저으며 사방에 물을 튀겨대는 사람도 보인다. 헤엄을 못 쳐 사경에 이르는 순간을 처음 목격한 것이다. 30분이나 되었을까. 아군의 비행기 하나가 해면을 스치듯이 돌아서 지나간다. 비행기를 쳐다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멀리 높은 산이 보인다. 그 산들은 배에 있을 때부터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뭍에 가까운 영해일 것이다. 

1944년 9월 포로들을 싣고 자카르타에서 수마트라섬 파당으로 출발하던 양순환호는 영국 잠수함에 의해 침몰되었다. (http://www.powresearch.jp 에서 인용)


바다 위, 목숨을 건 사투

바다 위는 조용했다. 바다에 빠졌을 때 추위를 느끼고 잠이 오면 죽는다고 한다. 나는 정신을 차리며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눈 앞에 보이는 가까운 사람은 포로로 보인다. “더 가까이 가서 서로 의지하자”라고 생각하며 사람 쪽으로 헤엄쳤다. 그는 내 쪽으로 헤엄치지 않았다. 그러나 “상어라도 달려들어 나를 해치려 한다면 나는 비명을 지를 테고 그러면 그가 달려오겠지”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도 위급하면 내가 달려가서 돕겠지” 별의별 이상한 생각을 다했다. 지금은 가까이 있으면 적이 되고 떨어지면 구원자가 된다. 희한한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뒤에서 물결치는 소리와 함께 조선말이 들려온다. 

“누구냐!”


뒤를 돌아보니 동료였다. 판자 하나를 밀면서 내 곁으로 접근해온다. 우리 둘은 손으로 판자를 잡고 의지했다. 두 사람이 판자를 잡자 판자는 물속으로 더 들어가 버렸다. 안전할 확률이 반감된 것이다. 그러나 서로 만난 우리는 굉장한 의지가 되었다. 말을 교환할 수 있는 동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명통의 덕분일까. 손발을 자주 흔들지 않아도 물 위에 뜰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물결이 입가와 눈가를 스치며 짠내를 풍긴다. 

“너도 쇠망치는 아닌 모양이다.”

“나 헤엄 좀 쳤어.” 

“열대 바다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음 얼어죽을 뻔했다.” 

“상어는 오지 않겠지?” 

“구조선이 곧 올 거야.” 

“하긴 여기는 육지에 가까운 바다니까.” 

“그럼 아까 비행기가 다녀갔으니까 구조선은 꼭 오겠지.” 


그러나 좀처럼 배는 보이지 않는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간다. 우리는 육지 쪽만 바라보았다. 한 손, 한 발이라도 움직이고 내저을 때면 무의식 중에 육지 쪽을 향하게 된다. 소용이 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가끔 판자에서 손을 떼고 헤엄도 쳐 본다. 눈 앞으로 보이는 산은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먼 것 같기도 하다. 또 지루한 시간은 흐르고 침묵이 계속된다. 침묵이 계속되면 걱정은 커지게 마련이다. 

“적의 잠수함이 떠올라와서 마구 쏘아대면 어떡하지.” 

“아까 비행기가 다녀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비행기는 폭뢰를 마구 던지니까 잠수함이 맥을 못 쓰거든.” 


그러는 사이에 또 비행기가 날아와 저공으로 우리를 스쳐간다. 너도나도 손을 흔들어댄다. 비행기는 한 바퀴 휙하니 멀리 돌다가 다시 스쳐온다. 헤어졌던 어머니를 만난 기분이다. 전 해상에 안도의 기분이 감돈다. 그러나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행기가 지나간 뒤는 또다시 고요가 계속된다. 기다린다는 것이 이와 같이 지루하고 절실한 적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타고 간 배가 어뢰를 맞아 바다에 뛰어든 적도 없었다. 


구명선의 도착

갑자기 함성소리가 나서 먼 곳을 바라보니 배가 한 척이 눈에 띈다. 얼마 후 또 한 척이 나타났다. 배는 점점 커졌다. 드디어 큰 물건이 되어 눈앞에 검은 절벽처럼 나타난다. 배에서 로프를 던지고 사람들을 끌어올린다. 로프를 붙잡고 간신히 배에 탔을 때야 이제야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닷물에 절어버린 군복을 벗고 새 옷 한 벌을 얻어 입었다. 물론 포로들에게까지 새 옷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옷을 짜 말리며 야단법석이다. 


석양이 되어 어두컴컴해질 무렵 육지에 상륙하였다. 그제야 끼리끼리 패를 지어 점검을 하니 동료들 두 명이 보이지 않는다. 전부 30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산사람의 입장에서 동료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내 목숨을 건졌다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하다. 이튿날 우리는 포로들을 접수하러 온 부대에 넘겨주고 이틀 동안 배를 기다리다 석탄을 때는 배를 타고 자바로 돌아온다. 


갑판에 트랩을 내려 밑을 쳐다보니 석탄을 넣고 있는 화부가 보인다. 얼굴은 시커먼 화부는 팬티만 입은 채로 간헐적으로 삽질을 한다. 몸뚱이도 새까매 흑인인지 황인인지 도대체 분간할 수 없다. 훨훨 타는 불빛이 그의 몸 전체를 비춰준다. 갑판에서 불어온 바람이 담뱃대 모양의 풍통을 통해 안으로 잘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다. 한 삽 또한 삽 그의 움직임은 기계적이다. 만일 저 화부나 기관사가 땀을 흘리지 않으면 이 배는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배의 제일 밑바닥에서 신음하듯 노동을 한다. 만일 어제와 같이 습격은 당해 배가 침몰하는 날이면 저들은 어찌 될까? 비상 신호는 잘 전달될까. 이 많은 계단을 언제 올라와서 바다에 뛰어든단 말인가.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갑판을 오르내릴 때 마주치는 그들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하고 두 입은 꼭 다물어져 있다. 그들은 자기 직업이 하늘이 주는 천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우리는 실종된 두 명의 동료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중 한 명은 이곳에 온 후 사물을 모으기에 열중했다. 외출할 때마다 무엇인가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어디를 가나 그의 배낭은 남의 것보다 배나 컸고 한쪽 손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들려져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걸을 때면 곁에 있던 포로가 수고를 해야만 했다. 쉬고 있을 때마다 그는 물건들을 꺼내어 다시 정리하느라고 바빴다. 이번에도 출장 갔다 돌아오니 물건들은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동료가 말했으나 어디로 갈지 누가 아냐며 이번에도 그것들을 가지고 나섰다. 배가 어뢰에 맞아 모두가 바다에 뛰어들 때 그는 “내 물건! 내 물건”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후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동료들은 육중한 몸집의 그가 짐꾸러미를 끌어안고 있다가 물결에 휩쓸렸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후 우리는 바다 이야기를 할 때면 “내 물건! 내 물건” 이란 말을 자주 입에서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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