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싱가포르는 100만 정도의 인구가 있는데 그중 50만 이상이 화교라고 한다. 광동 근방에서 예로부터 흘러내려온 화교들은 직업 또한 다양하다. 거상에서부터 시장상인 노점상 행상까지 다양한 상인들이 있다. 운전기사, 인력거꾼, 사무원, 막노동자 쿨리, 항해사, 어부, 뱃사공도 화교들이다. 장개석 정부의 연락책에서 브로커, 밀정까지 각양각색의 화교들이 이곳에 산다. 원주민인 말레이인 외에도 인도인, 각 나라 백인들이 싱가포르에 살지만 화교는 능력 면에서나 숫자에서 단연 우세하다. 그들은 언어와 의복과 관습을 절대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상가의 간판은 한자로 크게 쓰여 있다. 짜리몽땅한 여인들의 큰 말소리는 귀여움이 없다. 주방 앞치마와 닮은 남색 치마에 어정어정하고 다니는 걸음걸이는 서양 여인 같은 세련미가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싱가포르에 체류한 지 보름이 지났다. 다리가 무겁고 걷기가 힘이 든다. 생채소를 먹지 않아 각기병(비타민 B가 부족해 생기는 증상)에 걸린 것이다. 식사에 건조야채로 끓인 국물이 지급되는데 일본에서 가져왔다고 이야기하는 이 말린 풀더미는 말 따위에나 먹였으면 좋으련만. 누굴 원망하랴. 의사는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몸에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싱가포르는 섬의 도시다. 북쪽 조흐르바루(싱가포르와 마주한 말레이시아의 국경도시)까지 다리가 놓여 말레이 반도와 육로로 연결되어 있으나 반도 자체도 농업생산성이 미약하기 때문에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다. 게다가 지금의 이 난리에 병참항으로도 제 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 동서남북 사방의 전선에서 군수물자의 수요는 늘고 있지만 보급은 뒤따르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니 전선의 군인이 아닌 군속 따위를 어찌 풍족하게 먹이겠는가. 다시 자바섬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다리가 가벼워진 느낌이다.
얼마 후 자카르타 제1분견소로 귀환했다. 귀환길 내내 머릿속을 맴돈 생각은 각기병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식사문제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포로다. 육식을 좋아하는 서양인들이 마지막으로 고기 맛을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어느 날 냇가에서 갈대를 쳐내는데 돌연 네발로 기는 뱀 한 마리가 물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렸다. 머리는 주먹만 하고 뱃통은 큰 가마솥만 하며 꼬리 길이가 한 발이 넘는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긴장한 포로들이 결국에는 한 마리를 노획해서 수용소로 돌아갔는데 불에 구워서 먹고선 고기를 잘 먹었다 했단다. 우리는 웃어댔다.
“저자들은 엄청 배가 고픈가부지. 뱀을 잡아먹고...”
수용소 안에는 식용으로 쓰일 염소들이 있었는데 염소를 먹일 나뭇잎을 따기 위하여 리어카를 끌고 대여섯 명의 포로와 주택가로 나갔다. 우리는 이 일을 감빙 마가낭(염소 먹이기, 말레이로 감빙(Kambing)은 염소, 마가낭(Makanang)은 먹이기를 의미한다.)이라고 불렀다. 감빙 마가낭은 요즘 매일의 일과이기도 하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 나뭇잎을 따고 리어카에 채우면 으레 여주인은 우리더러 음식을 대접해도 되냐고 묻는다. 우리가 좋다고 대답하면 과실이나 빵, 연유와 커피를 물에 풀어서 대접한다. 포로들과 우리가 동시에 접대를 받는다. 포로들도 오랜만에 좋은 음식을 맛보게 되고 인정이 오고가는 대화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좋은 대접 받아서 나쁠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의 화란어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이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과부들만 살고 있는 이 가정들에 수입이 없어 포로들에게 육류를 충분히 대접하지 못한 아쉬움이 여인들의 얼굴에 더러 보인다. 누군가는 안방에서 부군이나 아들의 사진을 가지고 나와 우리에게 보여준다. 대개의 경우 남편과 아들의 복장은 군복이다. 주로 해군이 많았고 전사를 했거나, 포로가 되었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도 우리는 작업을 나갔다. 중년이 넘은 금발의 여인이 우유를 끓이며 음식을 장만하고 있고 곁에서 묘령의 여인 하나가 시중을 들고 있다. 우리는 그 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접대를 받고 흡족해하고 있다. 포로들은 작업을 시작한다. 나는 아까부터 내 눈치를 가끔 보던 그 젊은 여인의 곁으로 조금 다가갔다. 그녀는 물에 쟁반을 열심히 씻고 있었다. 말을 걸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무슨 말을 할지 좀처럼 첫마디가 나오지 않는다. 중년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틈을 타서 말레이어로 한마디 건넨다.
“저 여자는 어머니냐?”
그녀가 대답한다.
“아니다. 이웃집 할머니다.”
“당신은 이 집 식구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사느냐?”
“나는 저쪽에 산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아래쪽 방향으로 향해 가리킨다.
“어떤 집?”
하고 물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한번 더 더 가리켰나 정확한 곳은 알 수 없다. 단지 집이 그 근방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나는 용기를 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대답을 회피한다. 가도 부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깃든 것도 같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중년의 주인 여자가 이쪽으로 다시 나온다. 나는 포로들이 일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료에게 말했다.
“저 여자 하푸카스(Half-caste, 하프캐스트,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인의 혼혈을 지칭함) 말이야. 이 집 식구가 아니라네.”
“글쎄 나도 아닌 것 같은데. 머리 색깔도 눈도 검고 얼굴도 그렇고.”
그녀와 사귄다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물은 말에 그녀가 잘 대답해 주었다는 게 기분이 좋다. 일주일 후 나는 자진해서 감빙 마가낭을 나갔다. 먼저 가본 집을 목표 삼아 그 근방에서 나뭇잎을 따기로 했다. 그런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다소 헤매다가 겨우 지난번 방문한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집에 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름조차 모른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뭇잎을 따러 간 집에서 우유를 마시러 오라고 부르자 나는 다시 돌아갔다.
동료가 말했다.
“너 뭐 하고 있어? 여기 있지 않고”
“응 한 가지 찾을 것이 있어. 다음번에 나뭇잎을 딸 나무도 봐야 하고.”
나는 잎이 많이 딸 수 있는 나무가 있으니 거기로 가자며 일부 인원을 먼저 여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집 부근으로 끌고 같다. 한 포로에게 주인을 불러 나뭇잎을 좀 따자고 요청하라고 말했다. 안에서 나온 이는 순백인계의 말쑥한 여인이었다. 나는 실망했다. 그녀가 그의 모친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그 여인은 하푸카스이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서성거리는 동안 먹이가 될 나뭇잎은 한 수레가 되었다. 별 수 없이 수레를 몰고 돌아간다.
너의 집이 어디야?
몇 걸음이나 갔을까? 뒤에서 여인 하나가 걸어온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한 후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으로 돌아본 여인은 바로 저번 주에 대화를 나누었던 분명 그녀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먼저 아는 체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잘 있었어?”
서툰 말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너의 집이 어디야?”
그녀는 몇 걸음 뒤로 물러가 골목 안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잽싸게 그녀를 쫓아가서 골목 안에 자리 잡은 그녀의 집과 사립문의 모양을 똑똑하게 눈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에 들리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당황한다.
“오면 안돼! 안돼!”
그러나 나는 만족하였다. 이제 집은 알았으니까 인심이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레는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대화를 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 손을 흔들며 앞으로 바삐 걸어간다. 그녀가 손을 흔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집을 알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