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이 되어버린 성. 한 때 그곳에 살았던 유령들
해가 기울었다. 우리가 사는 거리에 도착하기 전 마차가 쫓아가야 하는 그 끝없는 벽을 불태우던 석양빛은 말과 마차의 그림자를 벽에 투사하면서 마치 폼페이의 구운 점토에 그려진 영구차처럼 붉은 바탕에 검은빛으로 뚜렷이 드러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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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조소 시간에 나머지 모든 것은 무시하고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닮지 않은 어떤 특별한 모델에 부합되는 모습을 빚으려고 전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조각가의 작업이 끝나자 할머니의 얼굴은 동시에 축소되고 굳었다. 얼굴을 관통하는 핏줄은 대리석 결이 아닌 꺼칠꺼칠한 돌의 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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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그들이 내가 생각도 할 수 없는 삶을 누린다고 상상했으나, 지금은 다른 남자들이나 다른 여자들과 비슷하며 단지 동시대 사람들에 비해 조금 뒤처진, 그러나 불균등하게 뒤처진 모습이었다... 다시 아내는 여전히 루이 15세 시대에 머무르는 데 반해, 남편은 말만 화려한 루이 필리프 시대에 살고 있었다.
360p
부인이 부끄럽게도 유행 지난 식물로 가득한 표본 상자로서만 날 기쁘게 한다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374p
죽은 자는 오래가지 않는다. 아! 슬프게도 그들은 관 속에서 먼지가 되며 우리 마음속에서는 더 빨리 사라진다!
305~306p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이 내게는 어딘가 집합명사처럼 보였다면, 이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을 지녔던 모든 여인들을 합산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내 짧은 젊음을 통해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라는 그 유일한 존재에 한 여인의 자리가 견고해지면 다른 여인이 사라지면서 수없이 많은 상이한 여인들이 겹쳐지는 걸 이미 보았다는 의미였다.
373~374p
커다란 검정 양귀비꽃 다발이 도드라지는 긴 노란 공단 드레스를 입은 공작 부인이 큰 키에 풍만하고 위엄 있는 자태로 갑자기 나타났다. 부인의 모습을 보고도 내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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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집 현관의 신발 닦는 깔개에 발이 닿았을 때 믿었던 것처럼 이름이라는 마술적 세계의 문턱이 아닌 그 종착역에 상륙했던 것이다.
394p
당신이 듣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입 밖에 내게 했던 그 섬세한 재치도, 며칠이 지나면 당신의 우스꽝스러운 점을 포착하여 그걸로 그들 방문객들 중 하나를 즐겁게 하면서, 그 방문객과 더불어 그토록 짧은 ‘음악적 순간’을 음미할 것이다.
400p
샤를뤼스 씨 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이 두 번째 흥분 상태에 사로잡혔으며, 이는 내가 지난날 다른 마차를 타고 느꼈던 개인적인 인상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콩브레의 페르시피에 의사의 이륜마차 안에서 마르탱빌 종탑이 석양빛에 그려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발베크의 빌파리지 부인의 사륜마차 안에서 나무로 뒤덮인 오솔길이 내게 떠올렸던 회상을 밝혀 보려고 했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마차 안에서 내 정신이라는 눈앞에 놓인 것은, 게르망트 부인의 만찬에서 그토록 지루하게 느껴졌던 대화들, 이를 테면 독일 황제나 보타 장군과 영국 군대에 관한 폰 대공의 이야기였다... 전차에서 보아도 흥미로운 그림이라고 한 게르망트 부인의 말은 틀렸지만, 그래도 내게는 훗날 소중한 진실의 한 부분을 담고 있었다.
4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