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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May 24. 2024

4권 : 활기

병약한 이가 되찾아야만 하는 기분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의 후반부는 주인공 마르셀이 화창한 여름의 바캉스 시절,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휴양지 발베크과 숙소인 발베크 그랜드 호텔을 지냈던 날들을 다룬다. 이야기는 발베크에서 만난 빌파리지 부인, 화가 엘시티르, 제2의 사랑이 된 질베르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간략하게 제시되었던 인물들이 재등장하면서 이들의 자세한 사연들이 마르셀과 교접하며 주욱 펼쳐진다.     


휴양지 발베크의 모델인 노르망디 해변의 카부르 해변과 그랜드 호텔


발베크에 가기 위해 도착한 기차역은 오늘날의 공항과도 다. 기차역은 지금 여기 실존하고 있는 공간을 단번에 변화하게 만드는 기차 여정의 방아쇠를 당긴다. 공간의 변화는 기차를 따라 단번에 이루어지고 여행지에 도착한 즉시 고장의 이름도 바뀌어버린다.    


여행의 특별한 기쁨은 출발지와 도착지의 차이를 지각할 수 없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아치를 될 수 있는 한 깊이 느끼게 하여, 우리 상상력이 단 한 번의 비약으로 살던 장소에서 욕망하는 장소 한복판으로 데려다주듯이 우리 상념 속에 있던 차이를 그 전체 안에서 그대로 느끼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거리를 통과한다기보다는 상이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지구상의 두 개별적인 고장을 결합하고, 하나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며, 또 기차역이라는 그 특별한 장소에서 실현되는 신비스러운 작업으로 압축되어 더욱 기적적으로 보인다.                  

12~13p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당대 과학기술의 최전선에 있던 교통수단 기차다.  화자가 묘사한 것처럼 기차는 공간과 공간을 링크로 연결하는 형태로 작동한다. 중간에 내리거나 멈출 수 없고 빠른 속도로 우리의 몸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당시의 기차는 오늘날의 비행기와도 같다. 자동차나 마차라면 승객이 원한다면 중간에 멈춰 설 수도 있다,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탄 채로 천천히 공간의 이동과 변화를 음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손살같이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는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마치 타임머신처럼 우리를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도약하게 만든다.      


사실 주인공이 발베크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가족들의 근심거리였다. 지병으로 인해 늘 병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건강을 세심하게 챙기지 않으면 낯선 환경이 되레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의사의 염려가 덧붙는다. 실제로 마르셀은 살던 공간이 바뀌자마자 곧바로 특유의 예민한 몸의 감각이 작용하여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가 곁에 없는 순간엔 분리불안을 겪는다. 호텔방이라는 낯선 환경이 그의 몸에 있던 신경세포를 더욱 곤두서게 한 것이다. 


내가 도착한 이 첫날밤, 나는 할머니가 방을 나가시자 파리에서 집을 떠나던 순간 그랬던 것처럼 다시 괴로움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이 공포는, 마치 낯선 방에서 잔다는 이 공포는, 어쩌면 현재 우리 삶의 가장 좋은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미래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우리 정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타나는 저 커다란 절망적인 거부, 그런 거부의 가장 소박하고도 막연하며 생리적이고 거의 무의식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후의 삶 속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관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내 추억이나 내 결점, 내 성격들을 가져갈 수 없으며, 또 나를 위해서도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무나 영원을 원치 않았다.                                                               

55~56p     


건강으로 인한 불안은 그가 이곳 발베크에 피서가 아닌 요양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인한 활동의 제약과 무기력함은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 즉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가는 시간들, 병약함으로 인해 운신의 제약이 따르는 상황들을 화자가 묘사하는 의식의 기저에는 늘 죽음이 떠돈다.      


잠을 자면서 꿈에 시달린 후 다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들도 마찬가지다. 잠은 일종의 죽음 연습과도 같다 죽음에 들어서기 일보 직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기억과 혼돈스러운 의식 같은 상황. 잠과 꿈의 경험은 그것이 본인의 것이든 혹은 타인 것이든 주인공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갑자기 잠이 들었고, 무거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년 시절의 회귀, 영혼의 윤회, 망자의 소환, 광기의 환상, 자연의 가장 원초적 세계로의 퇴행, 이 모든 신비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거의 매일 밤 잠 속에서 그 부활과 소멸의 커다란 신비를 깨치고 있는 것이다.                                           

299p     


마르셀이 밤과 어둠에 휩싸인 존재라면, 발베크에 만나게 된 두 번째 사랑 알베르틴과 그녀가 어울리는 소녀들은 한낮의 햇볕에 노출된 이들이다. 소설의 부제처럼 마치 활짝 핀 꽃과 같은 그녀들을 통해 마르셀은 활기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소녀들을 통해 건강한 신체가 가져다주는 생명력을 느끼며, 자그마한 일에도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또래들을 보면서 기운을 차린다.     


간혹 한 소녀가 다른 소녀를 넘어뜨리면, 요란한 웃음소리가 개인 삶의 유일한 발현인 듯 소녀들 모두를 동시에 흔들었고, 그 불분명한 쨍긋한 얼굴들을 지우면서 반짝이는 떨리는 한 덩이 젤리 안에 섞어 놓았다.                                 
305p


이렇게 몸이 쇠약한 이가 젊고 건강한 이를 보면서 매혹당한다는 설정은 늙고 병든 예술가 아센바흐가 요양차 방문한 베니스에서 미소년 타지오를 발견하고 갑자기 활기, 싱싱함, 생명력 즉 디오니소스적인 열망을 느끼게 되는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과도 유사 보인다.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미소년에게 불안한 활기를 느끼는 장면




마르셀은 발베크에서 알베르틴 이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인 화가 엘시티르다. 그는 엘시티르의 초대를 받아 아틀리에를 방문하는데 사방이 막힌, 그로 인해 빛을 통제할 수 있는 어둠의 공간. 즉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묘사된다.     


엘스티르의 아틀리에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종의 실험실 같아 보였고... 거의 모든 방향에 블라인드가 쳐진 아틀리에 안은 제법 서늘했고, 대낮의 햇빛이 그 찬란하고도 일시적인 장식을 벽에 다 붙이는 곳을 제외하고는 어두웠다.           

321~322p     


마르셀이 묘사한 아틀리에는 엘시티르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비밀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태초의 어둠과 같은 곳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동굴, 하지만 그만의 실험을 통해 그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창조해 낸다. 그가 작업을 시작하면 그 어둠 안에 온갖 형형색색의 빛깔들이 가득 채워지며 드디어 그만의 독특하고도 구체성을 띤 세계가 창조된다. 예술가의 새로운 전형인 르느와르나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를 모델로 했을법한 엘시티르는 그에게 예술에 대해 대상과 무관하게 사물을 재해석하는 은유라는 새로운 지각 방법론을 깨닫게 해 준다.      


지금 그의 아틀리에에 있는 그림들은 거의 이곳 발베크에서 그린 바다 풍경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각각의 그림이 가진 매력이 우리가 시에서 은유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 재현된 사물의 변형에 있으며, 만물의 창조주인 신이 명명함으로써 사물을 창조했다면, 엘스티르는 사물로부터 그 이름을 제거하고 다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사물을 재창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22~323p     


탑이 씌어 있는 성(城)은 꼭대기에서 하나의 탑으로 연장되고 밑에서는 거꾸로 된 탑으로 연장되어 완전히 둥근 성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바다 너머 숲이 늘어선 뒤로는 석양의 분홍빛에 물든 또 하나의 바다가 시작되었는데, 하늘이었다.

329p     


엘스티르는 마르셀에게 교훈을 건네기도 한다. 마르셀은 엘스티르가 지칭한 대화 속 한 청년이 본인 임을 곧바로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엘스티르가 이야기 속에서 언급한 젊은이가 마르셀이며, 또한 그 젊은이가 통과해야만 불쾌한 시절이 바로 마르셀이 경험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젊은 시절 어느 한 때는 생각만 해도 불쾌해져서 할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말을 하고 그런 삶을 경험하는 법이라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그렇게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게, 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일이라면, 이 마지막 화신에 앞서 어리석고 추악한 단계를 모두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지.                            

367p     


환멸의 시간들. 주인공은 후회로 점철된 허송세월을 견뎌야 비로소 삶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고,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가만 보면 그는 ㅣ예술가들에게 골고루 뭔가를 배운다. 뱅퇴유(작곡가)에게 무심히 의식을 깊숙이 찌르게 만드는 그런 창조적 수법을, 베르고트(작가)에게 작가는 작가 본래의 모습과 분리된 독자적인 자아를 가진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엘스티르(화가)에 또 한 가지를 배운다. 바로 마르셀이 불쾌하고 어리석음의 순간들 즉 환멸의 경험을 통과해야만 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엘시티르가 작가로서의 삶을 모색하는 마르셀에게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깨닫게 해 준 인물이라면 마르셀의 사랑 여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알베르틴을 만나게 된다. 알베르틴은 첫사랑 질베르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질베르트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곱게 자란 소공녀의 이미지라면 알베르틴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한 여성으로 표현된다. 알베르틴은 마치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등장할 것 같은 젊고 싱그러운 한 생명으로서 처음 마르셀의 시선 앞에 나타난다.     


갑자기 자전거 타는 소녀가 나타났는데, 검은 머리에 통통한 뺨까지 폴로 모자를 눌러쓴 그 소녀는 쾌활하지만 약간은 고집스러운 눈으로 오솔길을 따라 빠르게 걷고 있었다.

336p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는 알베르틴은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자전거를 타기에 알맞은 옷을 입고 페달을 굴리며 목적지를 스스로 설정해 간다는 것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속박되지 않은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을 의미한다. 또한 현대과학기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자전거를 탄다는 설정은 그녀가 현대적인 감각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녀는 열차, 자동차를 부르는 단어를 주인공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즉 최신 트렌드에도 민감함을 보여준다.     


마르셀은 알베르틴 뿐만 아니라 그녀와 어울리는 다른 소녀들과도 친해진다. 마르셀은 그녀들과 바람 부는 해안가의 절벽 위의 너른 평지에서 같이 간식을 먹고 놀이를 하며 깔깔대며 웃는다. 마르셀이 그녀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청명한 하늘과 바다의 여름. 그 여름처럼 맑고 투명한 싱그러운 느낌이 가득한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으로 묘사된다. 활기의 폭에 휩싸인 주인공. 그것만으로 주인공의 병약한 몸은 저절로 치유가 되는 것 같다.      


때로는 농장에 가는 대신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은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432~437p     


마르셀의 정신을 쾌활하게 만든 꽃핀 소녀들과 함께한 디오니소스적인 시간들은 여름이 지나버리면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다시 파리에 돌아왔을 무렵, 활기의 시간들은 그에게 아련하며 아득한, 하지만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창문 위쪽 채광창에서 프랑수아즈가 핀을 뽑고 덮개를 걷어 내며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은, 그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의 향기로운 황금빛 옷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 그토록 아득해 보였다.
5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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