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양현 May 10. 2024

3권 : 식어버림

한때는 뜨거웠음의 증거

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사랑의 식어버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린 두 사람이 있다. 한때 무섭게시리 오데트(이제는 스완 부인이 되어버린)에게 집착을 했지만 막상 결혼 후엔 그녀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스완, 그리고 스완이 오데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에게 빠졌지만 고장이 나버려 절연된 스위치 마냥 사랑이 꺼져버린 주인공 마르셀이 바로 당사자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며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고서야 한 결혼이, 다시 말해 스완의 마음속에서, 그의 삶을 함께 보내고 싶어 그토록 열망하고 절망했던 존재가 죽고 나서야 한 결혼이 바로 이런 사후의 행복 아니었던가?                                                            

86p     


스완과 마르셀은 작가의 두 분신이다. 스완은 사방이 온통 속물주의가 깊게 배인 사교계를 넘나들며 허송세월을 보냈던 어른 프루스트를, 마르셀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감각하며 작가로서의 소명을 키웠던 소년 프루스트를 의미한다. 프루스트의 두 자아 모두 공통적으로 사랑이라는 고개를 숨 가쁘게 넘었다가 내려간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다.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남은 것은 단열로 무장한 줄만 알았던 격실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틈 안으로 들어온 외풍으로 인해 싸늘해 버린 듯한, 그래서 그 공기를 어쩔 수 없이 실감해야 하는 재투성이와도 같은 마음가짐이다.


난 스완 부인을 방문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 뒤늦게 덧붙은 이유란, 내가 질베르트를 더 많이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되도록 빨리 잊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감정이 약해지고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고 나면, 새로운 요소가 우리 마음에 들어와 그 감정과 싸워서 점점 더 영혼의 자리를 빼앗고 드디어는 영혼의 모든 자리를 차지한다. 난 이것이 사랑을 죽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356p     


사랑이라는 감정이 미약해지고 그 틈을 불쑥 밀고 들어온 새롭고도 이물적인 요소. 그것은 한마디로 식어버림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식어버림이라는 형용사는 한때는 매우 깊고 맹렬했던 사랑의 사연이 주어로서 존재했지만 현재는 생략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식어버림은 예전엔 감정의 온도가 펄펄 끌었음을, 다시 말해 감정이 매우 뜨거웠음을 전제로 한다. 즉 뜨거웠음의 반대급부이자 증거가 바로 식어버림일 것이다.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은 한 때는 가득 담긴 물로 펄펄 끓어, 표면을 만지면 곧바로 화상을 입을 법한 대단한 위력의 주전자가 어느 틈엔가 그 열기를 정체 모를 도둑들에게 다 뺏기고 차디찬 금속붙이로 변해버린 처지와도 같다.   


마르셀이 사랑의 감정으로 뜨거웠을 시절, 그는 질베르트의 마음을 쟁취하기 위해 마구 달려들었다. 지병인 천식으로 인해 병상에 누웠을 때 그를 걱정하는 내용이 담긴 질베르트의 편지를 받고선 편지를 질베르트 자체로 인식할 정도로 남아있는 기력과 정신을 모두 질베르트에게 투사한다. 그는 언젠가 스완 부인에게 질베르트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누구인지 물었고 그녀가 질베르트에게 최고의 친구는 마르셀이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꿈과 현실이 일치하는 황홀감을 느낀다.     


"그 애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바로 당신이에요."

아마도 이런 완벽한 일치감 속에, 현실이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것에 덧붙고 겹쳐질 때, 마치 동등한 두 형상이 포개져 하나를 이루듯이, 그 현실은 우리가 꿈꾸던 것을 완전히 가리고 그 꿈과 혼동되는지도 모른다.

198p      


우리는 그런 마르셀이 정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사랑에 빠진 의식과 육신을 그런 뜨거운 열병 상태로 놔두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통은 열병에 빠진 우리의 정신과 신체기관을 낯설게 느끼고 그런 상태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비상하고 기이한 지금의 모습을 영원히 꿈꾸는 일부의 소수자를 제외하고(사랑의 열병 상태는 죽음의 기운과도 유사할 것이다) 대부분은 정상온도로의 복귀를 희망할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복귀 가능함을 기억하고 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열을 떨어내어 제 몸이 다시 돌아왔음을 자연스럽게 증명할 것이다. 열이 식을 때까지 자연스럽게 놔두느냐, 해열제를 써 억지로 열을 떨어뜨리느냐 방법의 차이만이 있을 뿐.     


스완과 마르셀은 후자의 방법을 취한다. 스완은 느닷없이 기이하고 혼곤한 꿈을 꾼 후 자기도 모르게 오데트에 대한 사랑이 저절로 식어버린다. 꿈이라는 강력한 해열제가 오데트라는 열병에 감염된 스완의 열을 순식간에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반면 마르셀은 여러 번 오랫동안 써야 하는 처방을 받았다. 그는 질베르트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노력과 속내가 좀처럼 합치되지 못하고 종종 이율배반적인 상황들이 전개된다. 마르셀은 질베르트가 본인의 집으로 초청할 것만 같은 내용이 담긴 답신편지가 자신에게 하루속히 전달되기를 초조하게 바라는 마음가짐과 그것이 도착할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정황의 논리를 수시로 오고 가며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의 시계추를 흔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 상태는 우리의 일생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정상적인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비상한 열정을 맹렬히 발산하는 에너지의 과잉보다 되레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감정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마음의 파동을 고요히 억누르는 평형감각의 엔트로피가 우리에겐 더 익숙할 것이다. 가끔 찾아오는 이 지독한 감기 같은 감정은 당연히 사나운 독열을 동반할 테고, 그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후유증으로 휘청이는 그 시간들은 우리 일생에 매우 예외적인 시절인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뭔가 우리 마음속의 불안정한 현존이다. 우리는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미 사랑은 우리 마음을 떠나고 없다.                                                 
273p     


사랑이라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인간은 불안한 현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평형감각이라는 두 발로 선 직립보행 상태로 놔두지 않고, 들뜸과 우울의 바람을 연거푸 날리며 몸을 휘청이게 한다. 자칫 넘어지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위태로움의 근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늘 불안하다. 한 발로만 딛고 대지를 서 있는 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현재의 몸이,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이의 마음 육체다.      


그렇게 불안한 현존을 만든 까닭은 당연히 사랑 특유의 물질성 때문이다. 사랑은 만질 수 있는 실체를 띠고 있거나, 그 형상을 곧바로 집어내거나 원하면 바로잡아 교정할 수 있는 고체화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든 변질되거나 휘발될 수밖에 없는 기체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흔적도 없이 기화되어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물질에 융해되어 흡수되어버리지는 않을지 조바심을 낸다. 사랑이라는 공기가 감미로운 향내음과 뒤섞여 우리의 숨을 달짝지끈하게 만들어버리는 연인과의 풍요로운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불안정한 실존의 당사자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 외다리 상태를 지탱하려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사랑 안에서 정신을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사랑의 물질적 속성을 깨닫는 순간에 사랑은 이미 우리를 떠나 있다.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다.     

프루스트는 인간을 불안한 현존 상태로 만드는 사랑의 물질성을 인정하지만, 언제든지 또 다른 기회를 만나면 열병이 다시 돋을 수 있고, 그 열병의 대상이 꼭 특정한 그녀에게 감염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열병을 앓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것이지, 열병을 일으킨 원인제공자가 꼭 반드시 누구여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독일인의 사랑과 프랑스인의 사랑이 달라 보인다. 독문학에서 묘사한 사랑의 대상은 흔들리지 않는 최후의 목표이지만, 불문학이 그린 사랑의 대상은 늘 유동적인 존재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동일한 사랑의 열병을 묘사하지만 대상에 대한 지독할 정도의 확고함은 그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추종성으로 인해, 열병에 걸린 이는 때때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로테여, 지금 나는 차디찬 무서운 잔을 들고 죽음의 도취를 마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잔을 나한테 주었습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생애의 모든 희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불변의 영원성으로 무장하고 그것이 부정될 때 기필코 죽음이라는 연기를 피워내 추종성을 숭고함으로 치환시키는 독일인의 사랑 미덕은,  순식간에 감염을 시킨 후 비정상의 온도로 신체를 들들 볶지만, 다시 쉽게 얼음장마냥 식혀버린 후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감염자를 찾아 유랑하는 열병의 바이러스 같은 프랑스 식 사랑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과 내 고통, 난 그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질베르트가 누군지 정확히 포착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이 사랑과 고통이 특별히 그녀에게만 속하지 않고 조만간에 이런저런 여인의 몫이 되리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다른 존재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가 사랑할 때면 이 사랑이 그들의 이름과는 무관하다고 느껴 미래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에 이미 그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해 느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322p     


한낮에 쏟아지는 빛줄기 마냥 뜨거웠던 사랑이 식어버린 후 도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한 귀환의 과정은 마르셀이 한때 열렬하게 사랑했던 질베르트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것은 이제 더이상 사랑이 아닌 단순한 감정으로 변화했다. 원점으로 되돌려진 상태의 사랑. 그래서 더 이상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마음의 고요한 평형상태. 그것으로 돌아가버린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본질을 한 때 뜨거웠음의 절반이자 다가올 미래 즉 식어버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할 때는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모두 담기에는 너무도 크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빛을 퍼뜨리지만 거기서 사랑을 멈추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어떤 표면을 발견하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애정이 되돌려지는 이런 반향을 우리는 그 사람의 감정이라 부른다.    

318p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