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약한 이가 되찾아야만 하는 기분
여행의 특별한 기쁨은 출발지와 도착지의 차이를 지각할 수 없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아치를 될 수 있는 한 깊이 느끼게 하여, 우리 상상력이 단 한 번의 비약으로 살던 장소에서 욕망하는 장소 한복판으로 데려다주듯이 우리 상념 속에 있던 차이를 그 전체 안에서 그대로 느끼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거리를 통과한다기보다는 상이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지구상의 두 개별적인 고장을 결합하고, 하나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며, 또 기차역이라는 그 특별한 장소에서 실현되는 신비스러운 작업으로 압축되어 더욱 기적적으로 보인다.
12~13p
내가 도착한 이 첫날밤, 나는 할머니가 방을 나가시자 파리에서 집을 떠나던 순간 그랬던 것처럼 다시 괴로움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이 공포는, 마치 낯선 방에서 잔다는 이 공포는, 어쩌면 현재 우리 삶의 가장 좋은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미래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우리 정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타나는 저 커다란 절망적인 거부, 그런 거부의 가장 소박하고도 막연하며 생리적이고 거의 무의식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후의 삶 속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관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내 추억이나 내 결점, 내 성격들을 가져갈 수 없으며, 또 나를 위해서도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무나 영원을 원치 않았다.
55~56p
갑자기 잠이 들었고, 무거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년 시절의 회귀, 영혼의 윤회, 망자의 소환, 광기의 환상, 자연의 가장 원초적 세계로의 퇴행, 이 모든 신비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거의 매일 밤 잠 속에서 그 부활과 소멸의 커다란 신비를 깨치고 있는 것이다.
299p
간혹 한 소녀가 다른 소녀를 넘어뜨리면, 요란한 웃음소리가 개인 삶의 유일한 발현인 듯 소녀들 모두를 동시에 흔들었고, 그 불분명한 쨍긋한 얼굴들을 지우면서 반짝이는 떨리는 한 덩이 젤리 안에 섞어 놓았다.
305p
엘스티르의 아틀리에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종의 실험실 같아 보였고... 거의 모든 방향에 블라인드가 쳐진 아틀리에 안은 제법 서늘했고, 대낮의 햇빛이 그 찬란하고도 일시적인 장식을 벽에 다 붙이는 곳을 제외하고는 어두웠다.
321~322p
지금 그의 아틀리에에 있는 그림들은 거의 이곳 발베크에서 그린 바다 풍경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각각의 그림이 가진 매력이 우리가 시에서 은유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 재현된 사물의 변형에 있으며, 만물의 창조주인 신이 명명함으로써 사물을 창조했다면, 엘스티르는 사물로부터 그 이름을 제거하고 다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사물을 재창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22~323p
탑이 씌어 있는 성(城)은 꼭대기에서 하나의 탑으로 연장되고 밑에서는 거꾸로 된 탑으로 연장되어 완전히 둥근 성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바다 너머 숲이 늘어선 뒤로는 석양의 분홍빛에 물든 또 하나의 바다가 시작되었는데, 하늘이었다.
329p
젊은 시절 어느 한 때는 생각만 해도 불쾌해져서 할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말을 하고 그런 삶을 경험하는 법이라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그렇게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게, 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일이라면, 이 마지막 화신에 앞서 어리석고 추악한 단계를 모두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지.
367p
갑자기 자전거 타는 소녀가 나타났는데, 검은 머리에 통통한 뺨까지 폴로 모자를 눌러쓴 그 소녀는 쾌활하지만 약간은 고집스러운 눈으로 오솔길을 따라 빠르게 걷고 있었다.
336p
때로는 농장에 가는 대신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은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432~437p
창문 위쪽 채광창에서 프랑수아즈가 핀을 뽑고 덮개를 걷어 내며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은, 그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의 향기로운 황금빛 옷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 그토록 아득해 보였다.
51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