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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Apr 26. 2024

2권 : 집착

물러남에 대한 다가감의 반동

2권은 1권에서 주인공 마르셀의 시선을 통해 피동적으로 묘사되었던 사교계의 거물 스완이 결혼하기 전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프리퀄, 즉 전사를 자세히 기술한다. 이야기는 스완과 사교모임서 만난 여성 오데트와의 기묘한 사랑을 그린 <스완의 사랑>과 마르셀이 1권에서 처음 만난 후 다시 파리에서 조우하게 된 스완의 딸 질베르트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한 <고장의 이름, 고장>으로 나뉜다.     


2권은 프루스트가 소설을 통해 일관적으로 추구해 온 주제인 스노비즘, 즉 다양한 인물군상의 속물적 성격이 보여주는 세계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다. 스노비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스완(스완은 아마 마르셀 프루스트의 어느 한 성격을 대변하는 이중자아 일지도)이며, 스완을 비롯한 인물들이 뿜어내는 온갖 종류의 스노비즘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하는 공간이 사교용 응접실인 살롱이다. 사교계의 꽃인 스완은 베르뒤렝 부인의 사교모임에서 처음 오데트를 만난다. 그동안 숱한 여성들을 만난 닳고 닳은 바람둥이인 스완이 처음부터 오데트를 맘에 들어한 건 아니었다. 하긴 여공부터 고관대작의 부인까지 다양한 여자들과의 만남을 가리지 않았던 그에게 오데트는 본인을 스쳐 지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특별할 것이 1도 없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외모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화가 베르베르에 탐닉할 정도로 전문가 수준에 가까운 예술애호가인 스완과 달리 그녀는 지적이지도 않았다. 매사를 즉흥적이고 얄팍한 감정으로 대하는 오데트의 행동은 스완에게 비아냥거림을 동반한다.      


하지만 스완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판화 한 점을 오데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한 날,  오데트가 판화를 보는 얼굴을 본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의 파도가 그의 가슴속에 밀려들어온다. 이 순간부터 스완에게 오데트는 그녀가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성 제포라와 닮았단 이유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정의된다. 즉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의 곁에 서서 풀어 내린 머리카락을 두 뺨을 따라 길게 드리우고, 피로하지 않게 판화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고 가볍게 춤추는 듯한 자세로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는 생기가 없을 때 종종 그러듯 머리를 기울이며 피로하고도 침울한 커다란 눈으로 판화를 바라보는 그녀 모습은, 얼마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 이드로의 딸 제포라 얼굴과 흡사했는지, 스완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에게서 그 걸작을 다시 발견했다는 데에서 비롯했지만, 이 유사성이 오데트에게도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그녀를 더 소중하게 만들었다.

68~70p


기존의 감정상태가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버린 이 기묘한 상황은 1권에서 마르셀이 마들렌 과자를 통해 어린 시절로 돌아간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르셀에게 과거는 죽은 상태였는데 마들렌 과자라는 촉매를 통해 순식간에 살아있는 추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완에게 마들렌은 보티첼리의 그림을 의미하며 그림을 매개로 본래 하찮은 존재였던 오데트(=죽은 상태)가 사랑에 빠져 소중한 존재로서의 오데트(=살아있는 상태)로 바뀌어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벽화 <모세의 생애>에서 묘사된 여인 제포라


불행하게도(불행하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불행일까?) 이제부터 두 사람 간의 권력관계는 단번에 역전된다. 스완은 오데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연인관계가 된다는 것은 늘 첫눈에 반한 상태를 전제로 출발하진 않는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주지 않은 상태, 즉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마음가짐이 슬며시 변화하면서 사랑이라는 변이를 낳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가로서의 프루스트는 영원성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사랑을 신화에 가까운 거짓 믿음으로 여기며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나에게 성큼 다가온, 내 마음속에 즉흥적으로 들어와 버린 불같은 감정이다. 사랑이라는 불은 순식간에 타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꺼지기도 한다.


그렇다. 그의 생각대로 수많은 사랑의 명멸이 우리의 도처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본질을 알면서도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덥석 그것에 꼼짝없이 포섭된다. 그리고선 그 유동적인 사랑에 잠시나마 열에 들뜬 것 같은 도취에 휩싸이기도, 그 사랑이 어느 틈엔가 휘발되면 비참한 감정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은 두 사람에게 공평하게 무게를 배분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양팔접시저울 같은 게 아니다. 사랑의 주도권을 가늠하는 저울은 늘 한쪽 팔에 올려놓은 접시가 힘겨운 듯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스완과 오데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스완이 오데트에게  푹 빠진 다음부터 주도권을 상징하는 이 양팔접시저울은 급격하게 오데트에게로 기운다. 그러면서 스완은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서로 간의 관계 맺음의 필연적인 약자가 되어버린다. 원래 사랑의 주도권을 재는 저울은 처음에는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다가 주도권의 무게를 다 재고 나면,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는 법이다.     


저울이 더 이상 미동을 하지 않은 후부터 주욱 스완은 오데트를 늘 애달파한다. 스완은 오데트를 스토커처럼 미행하기도 하고,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 낮 시간에 오데트가 무엇을 할지에 대한 집요한 망상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 망상은 행여 자신과 비슷한 인물인 포르슈빌 후작이 감미로운 말투를 교묘하게 건네며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로 작성된다.


집착! 물러남에 대한 다가감의 반동성

오데트를 향한 스완의 집착, 반대로 그런 스완을 대하는 오데트의 태도는 한마디로 물러남에 대한 다가감의 반동성이다. 스완은 24시간 온종일 오데트만을 생각하며 오데트에게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스완이 오데트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울수록 오데트는 그 힘을 흡수시킨 다음 외면이라는 감정의 구멍으로 흘려버린다. 그녀는 스완이 다가가는 만큼 뒤로 물러난다. 스완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다가가려면 하면 오데트 역시 동일한 속도로 뒷걸음친다. 두 사람은 만났을 때도, 만나지 않고 서로 간의 만남을 상상 속에서만 지속했을 때에도 계속해서 그런 식의 관계 맺음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런 공정하지 않은 관계에서 홀연히 피어오르는 감정이 집착이다. 즉 스완이 오데트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전력으로 기울이는 동안, 그것은 집착의 형태로 물질화된다.      


집착의 다른 말은 질투이기도 하다. 두 감정 다 상대방에 대한 평형감각을 잃었을 때 발행하며 본인을 미치광이로 만든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사상적 적자라고 할 수 있는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질투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한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스완의 질투는 자신에게서 오데트를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그 구체적인 대상을 투사하는 데 그가 바로 프로슈빌이다. 스완은 그의 라이벌이 포르슈빌이라고 여긴다. 그는 포르슈빌이 행여 오데트를 차지하지는 않을까, 나에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포리슈빌에게도 적용하는 것은 아닐까 망상을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다. 그는 화류계 출신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갖춘 오데트에게 생성될 다양하고도 파렴치한 시간들에 대해 그만의 추론을 거듭하며, 그만의 시간과 포르슈빌의 시간을 병존시킨 다음 평행우주의 물리성을 제멋대로 구현하기도 한다.


그는 문득 오데트 집의 램프 불 아래서 보내는 이 시간이 어쩌면 그 자체의 특별한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시간, 연극 소도구와 마분지 과일을 곁들인 그런 인위적인 시간이 아니라 아마도 오데트 진짜 삶의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포르슈빌에게 똑같은 안락의자를 내놓았을 것이고, 그가 잘 모르는 음료수가 아닌 바로 이 오렌지 주스를 따라 주었을 것 아닌가? 오데트가 사는 세계는, 그가 그녀를 그곳에 두느라고 시간을 보내고, 어쩌면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무섭고 초자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슬픔도 발산하지 않는 현실 세계가 아닐까!

195p

           

그의 마음 속에서 생성된 집착은 행동으로 발현되며 폭주한다. 오데트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집고 돌아다니거나 포르슈빌과 가증스러운 밀어를 주고받는 것은 아닌지를 궁금해하며 오데트의 편지를 몰래 들춰보기도 한다. 그녀가 사교계의 모임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행선지를 밟아보며 미행하려는 결심도 세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지금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폭주를 스스로 멈추기가 어렵다. 그가 오데트에게 다가가고 오데트가 그에게 물러날수록 그의 감각세포는 이미 작은 진동에도 곤두설 정도의 신경과민 상태가 된다. 자신이 현재 우스꽝스러운 사람인 것을 알지만 그렇게 만드는 마음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 그것 또한 바로 집착일 것이다.     


2권은 이렇게 시종일관 스완에 대한 집착과 이로 인한 반동으로서의 다양한 환영들의 행각을 묘사한다. 나약하고 비루한 존재가 되어가는 스완과 가증스러울 정도로 그러한 스완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오데트 사이의 기묘한 사랑의 물성은 종국에 기적적으로 변화한다. 정신분석의 대가 프로이트 박사가 좋아할 만한 기묘한 꿈을 통해 스완의 집착은 느닷없이 깨진 것이다. 그는 꿈을 통해 가까스로 집착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그녀라는 수렁 속에서 빠지게 만들었다면 그가 꾼 이 꿈은 수렁에서 탈출하는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는 이로서 가까스로 우연하게 오데트에게서 멀어진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느닷없이 사랑에 빠졌다면 마찬가지로 그런 방식으로 빠져나오는 마음의 움직임사랑일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더니!"

3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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