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양현 Jul 19. 2024

반환점을 돌며

세미나 모임을 통해 읽고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권 <게르망트 쪽>까지를 다 읽고 열기와 습기가 혼재된 7월의 여름을 느끼며 느긋하게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분량 상으로는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프랑스 문학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처럼 문체가 화려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묘사에 깊게 천착한 작품들이 많다고 여기는데, 나는 그러한 스타일의 뽐냄이 되레 이야기의 본질을 가리는 방해물로 혹은 주제의 얄팍함을 메우는 포장지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히려 캐릭터의 구축과 이야기의 구성이 뛰어난 영미소설이나 작가의 주제를 깊은 심연까지 파고드는 독문학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 소설의 특징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프루스트의 형식실험에 압도당하면서 나의 편견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에 대한 경외감으로 돌아서버렸다.     


대부분의 소설은 부담 없이 그냥 소설 그대로 읽으면 된다. 페이지를 살포시 열고 작가가 쓴 문장을 음미하면서 그 문장으로 묘사된 인물과 그 인물이 밀고 나가는 이야기를 상상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소설 읽기의 기본적인 독자의 태도, 즉 열린 마음에 기초한 감성적 접근 만으로는 제대로 된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몇 페이지 읽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순전한 독서감상에서 더 아나가 치밀한 독해가 필요하다.     


소설에는 작가가 인용한 많은 예술작품들이 등장한다. 지금은 무명이 되었지만 당대엔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림, 문학, 음악, 연극이 끊임없이 언급된다. 물론 우리가 지금도 잘 알고 있는 베토벤, 플로베르, 보티첼리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도 빠지지 않는다.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한 묘사, 한 가문의 족보를 탄광의 석탄처럼 캐들어가는 보학이나 민속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프랑스 귀족문화와 역사전통도 수시로 묘사된다. 작가가 뽐내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전부를 파악할 순 없다. 하지만 대충이라도 수박 겉핥기마냥 그것들을 스쳐야만 작가가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한 땀 한 땀 이야기에 결부시킨 맥락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감성적 접근과 함께 지성적 노력이 동반되어야 책의 내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의 벨에포크 시대와 동일한 고종의 대한제국시대를 배경으로 쓴 한국소설을 가정해 보자. 우리는 대원군이 집착하는 경복궁 근정전의 중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학농민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당시를 살았던 화가 장승업의 그림이나 신재효의 판소리를 작가가 묘사한다면 그 예술작품의 특징이 무엇인지 대충은 추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거의 정보가 없는 외국인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것은 우리와 다른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묘사한 많은 정보들의 의미를 대략이나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순수독서로도 충분히 작품을 음미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이들이 소설을 읽는다면 작가가 뿌려놓은 많은 맥락의 씨들이 발견되지 못하고 그냥 흙 속에 묻혀버린 채 남아있을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당대의 프랑스와 지난 역사의 프랑스의 총체를 이루는 문화, 예술, 사회의 여러 모습을 엄청난 분량으로 인용참조하고 있고 그 자체를 이야기 혹은 문학적 형식 안에서 흡수를 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간과하고 지나쳐버리면 독자는 작가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게 된다. 소설은 그냥 소설로 읽으면 된다지만 그러한 독자의 순진한 독서를 불가능하게 한 소설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물론 누군가는 그냥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등장인물, 그리고 그들이 놓인 세계, 그 세계 안에서 전개되는 서사가 있는 한 편의 순수소설로 읽은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연컨대 이 책의 기저에 깔린 다양한 의미맥락을 전혀 무시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을 온전히 읽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순진한 태도로 이 책의 페이지를 열었던 나 역시 프루스트가 이야기 전반에 깔아놓은 방대하고도 촘촘한 의미맥락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것들을 하나라도 더 소화하기 위해 순수한 소설 읽기가 아닌 이 작품의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대학원생 식의 문학접근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서는 실로 오랜만에 모처럼 다시 대학원을 입학해 연구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읽은 논문들 이외에 도움을 받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같이 읽은 책들


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한길사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니콜라 라고뉴, <프루스트 그래픽>, 민음사
마르셀 프루스트, <시간의 달빛을 한 몽상>, 민음사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청미래
유예진, <프루스트의 화가들>, 현암사
유예진,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현암사
유예진, <프루스트 효과>, 현암사
정명환, <프루스트를 읽다>, 현대문학
스테판 외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열화당     


그중에 인상 깊은 책은 저명한 불문학자이자 2년 전 작고한 정명환 교수님이 쓴 소설의 감상비평문인 <프루스트를 읽다>다. 그는 감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프루스트를 수십 년 가르친 불문학자인데도 불구하고 소설을 완독 하지 못했음을 부끄럽다며 고백한다. 그는 말기암 선고를 받은 후에야 소설을 읽겠다고 마음먹고 5년이 지나서야 완독에 성공한다. 완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그가 생전에 쓴 최후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무게를 가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이라는 중년의 남자가 지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환하는 이야기다.

정명환 교수님의 <프루스트를 읽다>의 서두

 정명환 교수님은 책에 대한 감상에 자신의 회한을 중첩시킨다. 프루스트가 소설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듯이 삶의 마감을 앞둔 노교수는 책의 서두에 이 책을 어머니의 영전에 둔다고 적어놓았다. 그 순간 프루스트를 흠모했던 롤랑 바르트가 죽은 어머니를 회상하며 프루스트적인 방식으로 쓴 <애도일기>의 내용이 머릿 속을 스쳤다. 나는 이 책을 그가 작고한 2년이 지난 지금 읽는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가 한창 먼저 세상을 뜬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포개놓은 흔적.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애달픔, 노학자가 그 결과물을 읽고 본인의 어머니에 대해 느낀 그리움. 두 저자 끄집어낸 기억의 이중구조가 아릿한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책이 <프루스트를 읽다>였다.     


이제 다음 주면 7권에 진입한다. 소제목 <소돔과 고모라>, 말 그대로 주인공 마르셀은 죄악과 금기, 혼돈의 카오스로 진입할 것이다. 그 세계가 마르셀에게 허송세월일지 아니면 인생에 새로운 지평을 열지가 궁금하다. 마르셀의 인생역정을 짐짓 예단하며 7권의 책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전 07화 6권 : 이미 죽어버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