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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un 28. 2024

6권 : 이미 죽어버림

유산이 되어버린 성. 한 때 그곳에 살았던 유령들

게르망트 쪽 2권은 죽은 자들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의 초반부는 기필코 외할머니를 살리겠다며 여러 의사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가족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신에 의해 그녀가 곧 복할 수밖에 없음을 전한다. 마르셀이 할머니를 병원에 모셨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의 내용이 연상될 정도로 불길하게 묘사된다. 할머니를 향해 길게 드리운 신원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손아귀의 그림자. 곧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의 신이 할머니에게 당도할 전조를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해가 기울었다. 우리가 사는 거리에 도착하기 전 마차가 쫓아가야 하는 그 끝없는 벽을 불태우던 석양빛은 말과 마차의 그림자를 벽에 투사하면서 마치 폼페이의 구운 점토에 그려진 영구차처럼 붉은 바탕에 검은빛으로 뚜렷이 드러나게 했다.

17p     


결국 외할머니는 죽는다. 외할머니는 마르셀을 아낌없이 보살핀 온기 가득한 인물이다. 병약한 손자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던 외할머니는 마르셀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지만 그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외할머니는 그가 사랑했던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섬망, 의식불명, 일시적 의식회복 등의 온갖 병적 상태가 복잡하게 그려진 상들을 선보이던 외할머니는 종국엔 비루한 육체의 껍데기만 남은 동물로 변해간다.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조소 시간에 나머지 모든 것은 무시하고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닮지 않은 어떤 특별한 모델에 부합되는 모습을 빚으려고 전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조각가의 작업이 끝나자 할머니의 얼굴은 동시에 축소되고 굳었다. 얼굴을 관통하는 핏줄은 대리석 결이 아닌 꺼칠꺼칠한 돌의 결처럼 보였다.

 26p     


외할머니의 임종 이후, 이야기는 이미 죽어 화석화되어 버린 자들 즉 게르망트 가의 귀족들을 묘사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제 마르셀은 소원대로 게르망트 가의 심장부. 게르망트 부인이 호스트가 되어 직접 개설한 살롱 안으로 들어간다. 초대장을 받아야만 입장할 수 있는 이 자리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고관대작과 귀족들이 모인다. 한국에서 유교적 가풍이 굳건하게 내려온 어느 종가의 집안 어른들이 제삿날 모여 앉아 양반타령을 하듯 이들 역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중세 시기의 조상들 근원까지도 깐깐히 되짚으며 가문의 영광을 뽐낸다. 이들이 보학을 논하는 시간은 이야기의 주체를 미래로 투사하는 진보의 시간이 아니다. 보학은 시간을 거슬러 가문 생성의 원점에 닿으려 하는 보수반동과 퇴행의 시간이다.     


전에는 그들이 내가 생각도 할 수 없는 삶을 누린다고 상상했으나, 지금은 다른 남자들이나 다른 여자들과 비슷하며 단지 동시대 사람들에 비해 조금 뒤처진, 그러나 불균등하게 뒤처진 모습이었다... 다시 아내는 여전히 루이 15세 시대에 머무르는 데 반해, 남편은 말만 화려한 루이 필리프 시대에 살고 있었다.

360p


부인이 부끄럽게도 유행 지난 식물로 가득한 표본 상자로서만 날 기쁘게 한다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374p     


외딴섬처럼 존재하는 귀족들의 살롱. 투명유리로 외관을 세운 수족관 안에 갇힌 그들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벨 에포크로 대변되는 요지경 세상. 사륜마차는 자동차로 대체되었고 굳이 새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발명품이 날갯짓을 하며 하늘을 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인 살롱 안에서 생기를 잃어가며 딱딱한 돌로 점점 화석화되어 간다. 이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산다. 그들에겐 미래는 없고 오로지 한때 귀족들의 영화가 태동되었던 어제 만이 존재한다.      


그들이 살롱 안에서 웃고 떠들고 즐기는 모습은 저마다의 존재를 또렷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영화의 엔딩에서 이야기를 마감하기 위해 천천히 화면을 어둡게 만드는 기법 즉 페이드 아웃처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존재를 강제퇴거시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페이드 아웃이 완전히 진행되어 사방이 보이지 않는 절대암전이 되었을 무렵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온 데 간 데 없다. 온갖 치장을 한 그들의 화려한 모습들,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어둠에 갇혀 외부에 발화되지 않고 화석으로만 남는다.     


귀족들이 아무리 그들의 존재를 오롯이 세우려 해도 소설 속에서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유산으로서의 성. 한 때 그 성엔 소유주인 성주가 수십여 명 시종들의 섬김을 받으며 살았을 테고 성주와 귀부인이 수시로 개최하는 파티에 모이기 위해 성을 방문한 귀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100년도 전에 죽어버렸고 그들의 모습은 책이나 그림으로만 남아 역사로만 전해진다. 게르망트 가의 일족과 그들의 살롱에 들어온 이들 역시 현재 유산으로 남은 성과 한 때 그곳에 살았던 성주 운명과 동일하다.      


이미 죽은 존재들. 프루스트는 그들의 경험한 최후의 목격자답게 온전한 기억으로 그들을 유령화 시켜 한시적으로 부활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와 행동은 모두 근본적으로 부질없다.    

 

죽은 자는 오래가지 않는다. 아! 슬프게도 그들은 관 속에서 먼지가 되며 우리 마음속에서는 더 빨리 사라진다!

305~306p     
게르망트 부인의 모델인 그레퓔 백작부인

죽은 자들을 이끄는 이들. 사교모임의 여왕벌은 게르망트 부인이다. 마르셀은 오로지 게르망트 부인과 친분을 쌓기 위해 죽은 자들이 득실 한 이곳에 진입했다. 언덕 끝에 자리자은 그러나 평민들이 범접할 수 없게 높다란 방벽으로 둘러 스스로를 고립시킨 외딴 성. 이따금 단단하게 치솟은 무거운 성문을 열고 호위 시종들에게 둘러싸인 채 황금마차를 타고 들판으로 내려오는 왕비처럼 접근난망의 고귀한 신분의 여인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천한 신분의 소년과 그가 그려낸 환상신화. 그러한 방식과 유사하게 게르망트 가문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우상화된 이가 바로 게르망트 부인이다.     


즉 게르망트 부인이라는 어감은 단지 지금 마르셀이 목격한 게르망트 부인 단 한 사람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게르망트 가 역사 속에서 게르망트라는 이름이 들러붙어버린 수많은 귀족여성들을 공통포괄하는 단어다. 그렇기에 마르셀이 게르망트 부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그것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닌 게르망트 가 전체와 그들의 신화, 그들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아우르는 보통명사가 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이 내게는 어딘가 집합명사처럼 보였다면, 이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을 지녔던 모든 여인들을 합산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내 짧은 젊음을 통해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라는 그 유일한 존재에 한 여인의 자리가 견고해지면 다른 여인이 사라지면서 수없이 많은 상이한 여인들이 겹쳐지는 걸 이미 보았다는 의미였다.

373~374p     


하지만 살롱 안에서 마르셀이 생생히 목격한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린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쓰인 동화책에서 갓 빠져나온 듯한 판타지로 우상화된 게르망트 부인은 수동적이고 게으른 살롱의 귀족들과 달리 주체적인 사고가 가능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사고를 하고 가문이라는 과거에 발목이 단단히 잡혀 있다. 남편 게르망트 공작은 일종의 쇼윈도 부부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집단구성원에 불과하다.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마르셀의 개인적인 연모는 화려한 귀족세계에 대한 동경과도 맞닿아 있었지만 게르망트 부인과 그 일족의 실상을 깨닫는 순간 그들에 대한 동경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만다.      


커다란 검정 양귀비꽃 다발이 도드라지는 긴 노란 공단 드레스를 입은 공작 부인이 큰 키에 풍만하고 위엄 있는 자태로 갑자기 나타났다. 부인의 모습을 보고도 내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102p          


게르망트가에 대해 느꼈던 환상과 마술의 세계. 그것은 리얼리티가 부재한 하나의 판타지였다. 마르셀이 실제로 리얼리티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자 신화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들 역시 발을 닦기 위해선 신발 닦는 깔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비루한 범인(凡人)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이 집 현관의 신발 닦는 깔개에 발이 닿았을 때 믿었던 것처럼 이름이라는 마술적 세계의 문턱이 아닌 그 종착역에 상륙했던 것이다.

394p     



 

자신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에둘러 치고,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끼리의 인간관계를 도모하고 교환가치를 갈구하는 세상인 사교계. 사실 사교계는 그 모임의 주체가 귀족이든 부르주아든 본질은 같다. 누군가 초대를 받아 사교모임에 처음 등장을 했다면 그는 많은 이들의 추파나 호의를 제공받을 것이다. 한동안 사교계의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러 번 사교모임을 방문하고 그에 대해 익숙해지면, 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나면, 이제부터는 그의 단점들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전까지 그를 묘사하는데 쓰인 긍정의 표식은 대개 험담이나 비꼼으로 바뀐다. 사교계의 작동방식은 늘 그렇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늘 부패와 변질되는 장소가 바로 사교계인 것이다.


당신이 듣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입 밖에 내게 했던 그 섬세한 재치도, 며칠이 지나면 당신의 우스꽝스러운 점을 포착하여 그걸로 그들 방문객들 중 하나를 즐겁게 하면서, 그 방문객과 더불어 그토록 짧은 ‘음악적 순간’을 음미할 것이다.  

400p   


이야기의 마지막. 마르셀은 가까스로 게르망트 부인의 살롱 즉 환멸의 소굴에서 빠져나온다. 그다음 정차역은 선약을 했던 샤를뤼스 남작의 댁. 그는 부지런히 마차를 타고 남작의 집에 당도해야 한다. 마르셀은 마차 안에서 익숙했던 상념을 경험한다. 그것은 콩브레에서의 유년시절, 마차 안에서 바라보았던 마르탱빌 종탑과 발베크에서 빌파리치 부인의 마차에서 세 그루의 나무를 목격했던 순간과 잠시나마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순간이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에 닿으려는 의지와 결부되어 있다면 샤를뤼스에게 가는 마차 안에서 지금 이 순간 느낀 것은 마르셀에게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르셀은 막 이미 죽어버린 이들이 잠시나마 활개를 치는 환멸의 시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예전의 두 마차 안에 앉았을 때 머릿속에 투사된 것이 소명이라는 미래였다면 지금은 화석화어가는 과거를 경험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마르탱빌 종탑과 세 그루의 나무 곁을 지나는 마차는 마르셀을 미래로 도약하게 하는 좋은 추진체가 되었다면, 지금의 마차는 비루하고 쓸모없는 세계를 탈출하고자 하는 수단, 방법으로만 사용된다.      


샤를뤼스 씨 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이 두 번째 흥분 상태에 사로잡혔으며, 이는 내가 지난날 다른 마차를 타고 느꼈던 개인적인 인상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콩브레의 페르시피에 의사의 이륜마차 안에서 마르탱빌 종탑이 석양빛에 그려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발베크의 빌파리지 부인의 사륜마차 안에서 나무로 뒤덮인 오솔길이 내게 떠올렸던 회상을 밝혀 보려고 했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마차 안에서 내 정신이라는 눈앞에 놓인 것은, 게르망트 부인의 만찬에서 그토록 지루하게 느껴졌던 대화들, 이를 테면 독일 황제나 보타 장군과 영국 군대에 관한 폰 대공의 이야기였다... 전차에서 보아도 흥미로운 그림이라고 한 게르망트 부인의 말은 틀렸지만, 그래도 내게는 훗날 소중한 진실의 한 부분을 담고 있었다.

403p    

 

마차 안에서 마르셀이 한 사색이 꼭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예전의 유사한 경험과 달리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가다듬게 하는 데는 분명 실패했다. 하지만 마르셀을 번뜩이게 한 이 상념은 귀족들이 화석화되어 가는 과거, 죽은 유령들이 나누는 의미 없는 시간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음을 깨닫게 했다. 상념은 거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귀족들의 살롱이 한낮 허깨비 같은 세계라는 것을 자각하게 해 준 인생의 소중한 진실을 느끼게 한 경험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결정적 순간이 바로 마차 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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