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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Feb 18. 2018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은 듯 달라졌다.

인생 3막 1장






 월요일. 아침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 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하지 못한 양치 하려고 도서관 화장실에 .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청바지에 후드 점퍼를 입은 한 여자가 보였다. 언뜻 보면 시험 기간의 대학생 같기도 했지만, 세월 감이 확연히 느껴지는 얼굴이 그녀가 20대 후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 긴 것도 아니었지만 활동하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올려 묶은 머리와, 생활 용품을 한가득 넣고도 여유 공간이 꽤나 되는 백팩이 타지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려는 그녀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사실 얼마 전에 팩을 잘못해서 난 볼의 뾰루지가 신경 쓰이지만, 적절한 화장으로 티 나지 않게 감추었다. 편하게 외출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나오는 일은 하지 않는다. 화장 후 조금이라도 더 예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지금 이 모습이 그동안 그녀가 꿈꿔왔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한 28살 커리어우먼의 모습이 아니라, 캐나다의 작은 도시에서 먹고살기 위해 아둥 바둥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이 말이다.



 그날은 일주일 만에 갖는 day off였고, 이사 갈 집을 하나 보고 바로 학원을 가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떨어진 교정 유지 장치를 붙이러 치과에 가야 했고, 한국에서 온 택배를 찾으러 우체국에 들려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밥을 차려먹었지만, 잠깐의 남는 시간을 틈타 팀 홀튼에 들려 라떼와 머핀 세트를 먹어 배를 더 든든히 했다. 끼니때에 맞춰 밥을 먹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배를 더 든든히 하기 위함다. 역시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아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식같은 1차원적 욕구만 충족돼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1차원 인생이다.









 어제는 이른 아침부터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가랑비가 축축하게 내렸다. 무릎에 거의 닫는 길이의 워커를 신고 거리를 걸으니 '딱딱' 신발굽 소리가 났다. 그냥 비 오는 거리를 걷기만 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산뜻할 때, 내가 이 도시를 조금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기 여행자의 마음으로,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지 못한 무언가로 대체하면서 사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이 곳이 내 새로운 삶의 터전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은 듯 달라졌다. 살아가는 장소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서 혹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인가' 없이는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는 예전의 나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혼자 행복해지려고 타지에 와서 철저하게 혼자가 된 느낌이다. 타지에서의 7개월 차 삶은 적응한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한없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장소에 대한 자각이 없다가, 현관을 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이 파란 눈의 금발일 때 '아 내가 외국에 있구나'하고 깨닫는다.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좋아하는 향이 가득 난다. 출국 전 점포 정리를 하던 가게에서 1+1으로 건진 향초 덕분이다. 항상 가지고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틴케이스에 든 것을 골랐다. 하나는 지금 나한테, 나머지 하나는 한국에 있는 그 사람한테 있다.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한 번씩 들었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근래 내면에 가장 많이 떠올랐던 물음은 '내가 이곳에서 평생 살 수 있을까?' 혹은 '나는 이곳에서 평생 살고 싶은 걸까?'이다.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다.


엄마가 푹신한 담요를 샀다고 기어이 택배를 한번 더 보내준다고 우기신다. 받는 김에 집에서 보내줬으면 하는 물건 리스트를 적어본다. 겨울 외투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작년 겨울에 매일 입고 다니던 회색 코트를 하나 받았으면 좋겠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2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샀던 니트 치마도 받았으면 좋겠다. 이곳에서도 살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과거의 '내'가 사두었던 옷들이 생각난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고 싶으면서도 예전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퇴사하고 했던 유럽 여행 사진들을 들춰 보며 그때를 생각해 본다. 잊지 못할 장소들이었고, 함께 했던 사람들 덕에 더 좋았다. 하지만 유럽 여행을 한번 더 할 기회가 생긴다면, 가보지 못한 다른 나라들을 가보고 싶다.




 이상하게 나는 한번 한 것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하는 경향이 있다. 물건도 그렇다. 쓰던 것을 다 사용하면 똑같은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산다. 왠지 기존에 쓰던 것보다 더 나에게 잘 맞는 물건이 세상에 존재할 것만 같다. 내 세계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로만 한정되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는, 한 가지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을 돌리게 되는 습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어떤 체형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떠올려 본다. 스스로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카페에서 음악을 듣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좋다. 마음이 아픈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글을 써보라는 조언을 한다. 이미 그들 모두 메모장 혹은 블로그에 '끄적거려 놓은' 표현으로 묘사하는 글들이 있다. 그것을 정리하거나 업로드하지 않았을 뿐. 나는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데이 그램' 어플리케이션에 일기처럼 메모를 하는 편이다. 그리고 여전히 하루하루를 글로 정리하고, 생각 없이 흘러가는 것을 경계한다. '오늘 정말 좋은 토요일이었다'는 문장이라도 적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사무실에서 글을 쓰던 시절이 남겨준 마지막 강박관념일까.








 외국에 있는 김에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려고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무언가에 대한 구매 욕구를 억누르다가도 한 번씩 폭발하는 날이 온다. 그때는 어제가 월급날이었던 것 처럼, 주저없이 카드를 긁는다.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보기에 예쁜 생활 용품, 순간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들, 화장품, 와인.. 이것 저것을 끌리는대로 골라든다. 술이 워낙 비싼 곳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 몇 달은 누군가가 사주는 술만 마시곤 했었는데, 역시 그것은 술꾼에게 가혹한 삶이었다. 말리부 하나만 사서 11불 정도 하는 위스키랑 같이 마시려고 했었는데, 어느새 찬장 한 칸이 리큐어로 가득 찼다.




  오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캐나다의 모든 가정집에는 건조기와 함께 오븐이 있다. 복잡한 작동 방법에, 쉽게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븐은 별 것 아닌 물건이었다. 음식을 꺼낼 때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하지만 사용하기에 어렵지 않다. 비건 마트에서 호기심에 사 두었던 병아리 콩가루, 타이거 넛츠 가루, 햄프 시드를 섞어서 쿠키 틀에 넣고 타이머를 맞춰본다. 아무런 조미료를 넣기 않았기 때문에 어떤 '맛'이 나지는 않지만 하나의 간식거리가 된다.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것은 인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 준다.


어떤 날은 아무 이유 없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다. 피곤한 일정도 아니었고, 식사를 거른 것도 아닌데, 중력의 힘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어깨가 축 처진다. 밤이었다면 와인이라도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볼 텐데,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날에는 그린 스무디를 사러 간다. 한 잔에 만원 가까이하는 사악한 가격이지만, 신선한 재료와 그것에 포함된 비타민은 몸에 힘을 준다. 고기보다 훨씬!









 일상이 무료해지고 단순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바쁠 일이 없기 때문이리라. 인생에서 무언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다. 1년 뒤의 내 모습 같은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다. 내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어떤 사람과 함께하고 있을지 예상이 되지 않는다. '하루'를 사는 데 익숙해져서 '미래' 따위는 너무 멀리 느껴진다. 요새는 특히. 무언가 감정적인 상황이 생기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감정에 집중해서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한가하다. 대학교 2학년 때가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왠지 매일 마음이 헛헛했다. 유난히 식욕이 돋았고, 입에 다이어트를 붙들고 살았다. 허전한 건 배가 아니었는데, 그냥 배를 채웠다. 대학교 수업 중에 사랑과 이해, 관계의 영속성 같은 수업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혼자 배워가기에 어려운 것들 말이다.




 밴쿠버 공공 도서관에 진소라 작가의 소설이 있었다. 중학교 때 '이라샤'를 읽은 이후부터 작가님의 큰 팬이었다. 그녀의 소설에는 항상 인생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어떨 때는 바보 같이 착하기만 한 것 같지만, 중요한 순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큰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한다. 살아가면서 그 주인공들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D등급 그녀' 책에 실린 그녀의 말을 좋아한다.


왜 글을 쓰는지 고민합니다. 쓰고 나선 왜 썼을까 후회하고, 뭐 그렇게 엉망은 아닐 거야라는 위로와 잘 쓰고 싶어 사이에서 매번 괴로워합니다.


마음에 깊이 남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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