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A Jan 15. 2018

밴쿠버의 소소한 즐거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6개월.





 시간이 적절히 흘러간다. 



'벌써 반년이 흘렀구나'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반년' 같은 시간이었다. 하루하루가 비어있는 듯 채워져서 지나갔다. 사념에 빠질 시간이 많은 게 여유를 의미하는 것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낭비'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직장인에서 일반인으로 직업을 변경한 후 삶에서 의미 없이 흘러가는 순간은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5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에 잠깐 무기력증에 빠졌었다. 매일 일과가 똑같아서 온 슬럼프일까, 풍족하지 않은 생활에 항상 무언가를 참고 미루다 보니 행복까지 미뤄졌던 걸까. 원하던 곳에서, 원하던 생활을 하고 있는 데 행복한 마음이 들지 않는 우울한 시간이었다. 아마 가장 큰 원인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타지 생활은 외로움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새로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온 한국의 지인들이 그립다.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에 사로잡혀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을 때, 이제 나에게 '혼자'는 너무 어려워졌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6개월을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모두 캐나다, 밴쿠버에 와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잊어버리지 않게 하나씩 정리해보려고 한다.


 





와이너리 투어


 밴쿠버가 속한 브리티시 컬럼비아(BC) 주에는 사실 'Okanagan 오카나간'이라는 유명한 와인 산지가 있다. 매 계절마다 '와인 축제'를 열고, 그중 겨울 축제는 '세계 제 1의 아이스 와인 생산지'로 평가되기도 하는 캐나다 답게 아이스 와인이 주인공이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 탓에 쉽사리 갈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신 밴쿠버 근처 Surry지역에 있는 한 와이너리( Vinoscenti vineyard)를 투어 했다. 그루폰에서 산 쿠폰으로 2명이 소믈리에와 함께 포도밭을 구경하고, 치즈 플레이트&와인 3종류를 테이스팅 하는데 $25(CAD)이 들었다.








 이 곳을 방문한 날은 비가 올듯한 흐린 날씨의 늦은 가을날이었다. 수확철이 지난 후였기에 밭에는 장식용으로 남겨둔 포도 몇 송이만 남아있었다. 나무 건물의 와이너리는 아담했지만,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와인은 화이트 와인 1개, 레드 와인 2개를 시음했다. 마지막으로 시음한 까베르네 쇼비뇽의 끝 맛이 생각보다 진했던 기억이 난다. 선반에 장식된 그림이 예쁘다고 이야기하니, 소믈리에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이 와이너리에서는 정기적으로 와인을 마시면서 페인팅을 하는 클래스를 여는데 본인도 매주 참석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면 그림이 훨씬 더 예술적으로 그려진다고 덧붙였다. 설명만 들어도 그 클래스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캔버스에 뿌려진 빨간 액체가 물감인지 와인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올 것이 분명하다.







Flyover Canada


 비교적 최근에 유명 관광 명소인 캐나다 플레이스에 4D 놀이기구가 생겼다. 티켓을 끊으면 먼저 작은 룸에 들어가서 주의 사항을 안내하는 비디오를 5분가량 본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이 방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 거대한 스크린이 있는 방으로 이동하는 데 이 곳에 후룸 라이드와 비슷하게 생긴 라이드가 있다. 의자에 앉아 안전바를 내리면 스크린에 캐나다의 자연경관이 구석구석 보이고, 의자가 앞뒤로 움직이자 마치 헬리콥터 같은 것을 타고 그곳을 실제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카나간 와인 산지가 펼쳐지기도 했고, 2010년 동계 올림픽의 메인이었던 휘슬러 지역, 나이아가라 폭포(이 장면을 볼 때는 머리 위에 물이 뿌려졌다)가 보이기도 했다. 스크린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생생하겠어라고 얕잡아봤다가 캐나다의 풍경에 감동받아서 나왔다. 비용은 한화로 2만 5천 원 정도지만,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타볼만한 라이드인 것 같다. 서울에도 이런 놀이 기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코엑스나 남산에 설치해두고 제주도, 담양, 전주 한옥마을, 강릉 해돋이 장면 등을 보여주고, 가상 사진도 찍을 수 있도록 기계도 설치해 놓으면 관광 수입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https://www.flyovercanada.com







Playland at the PNE

 

 밴쿠버 외곽지역에는 여름에만 잠깐 생기는 놀이동산이 있다. 마치 옥토버 페스토 기간에만 생기는 뮌헨 페스티벌 장소처럼, 놀이기구와 푸드 트럭이 뚝딱 설치됐다가 날이 추워지면 사라진다. 에버랜드, 롯데월드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지만 분위기가 굉장히 미국적이고 클래식하다. 풍선을 맞추면 인형을 받을 수 있는 사격게임이나 각종 스폰서 행사 부스, 개인 상점들도 많다. 밴쿠버 판 츄러스인 미니 도넛을 사 먹기도 하고, 야외 광장에 앉아 맥주 한잔을 기울이면서 여름밤을 보냈다.  




 캐네디언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 놀이동산은 예전부터 항상 있던 고전적인 장소라고 설명해줬다. 놀이기구를 타지 않더라도 밤에 사람들 사이를 함께 손잡고 걸으면서 화려한 불빛의 놀이기구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겠다고 생각했다. 즉 데이트 코스로 적격인 장소란 뜻이다.






Dance Academy


 사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학원에서 춤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라라 랜드를 보고는 탭댄스를 배우고 싶었고, 클럽 댄스나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댄스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부담감과 망설임이 커졌다. 어렸을 때도 배워본 적이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못해서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오랜 기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갈 수 있을까. 배워서 크게 남는 게 없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게 맞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학원을 등록하러 가는 발걸음을 돌리고는 했다.







 해보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이곳에서 해보기로 했다. 춤을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는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서 나의 정신과 체력을 소모하고,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데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설명을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행동을 따라 하면 되니 큰 문제는 없을 테고, 외국인들 앞이니 왠지 덜 창피할 것 같기도 했다. 구글 지도에서 dance academy를 검색해서 다운타운 중심가에 있는 한 학원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시간 난이도별 수업이 있고, 시작 전에 바로 방문 등록해서 1회 체험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힙합, 탭, 발레, 재즈, 밸리, 팝핀, 스트립 등 굉장히 많은 종류의 수업이 있고 5회권, 10회권, 20회권 등 듣고 싶은 대로 등록할 수도 있다. 정말 다양한 국적과 나이 때의 사람들이 매 시간 수업을 들으러 이곳에 온다. 여자가 90% 이상이지만 어떤 수업에도 한두 명의 남자들도 있다. 춤을 배우는 모든 학생들은 거울 앞에서 굉장히 당당하고, 선생님이 알려주는 동작을 100%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로 춤사위를 조금씩 바꾸기도 한다. 하나의 연속된 춤을 익히고 따라 할 때마다 모두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부족하지만 해냈다는 것을 함께 기뻐한다.






힙합, 스트립, 탭 댄스를 체험하고 탭 댄스를 배우기로 결정했다. 탭 댄스 클래스는 다른 수업과 달리 강사 선생님이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셨다. 그는 움직일 때마다 정말 경쾌하고 똑 부러지는 탭 소리를 냈는데, 한 명 한 명의 스탭을 봐주면서 틀린 부분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지금 'Wrong'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Different'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고. "Be ready to make a mistake and accept the mistake" 왜냐면 지금 여기 있는 목적은 "Happy dancing"이니까 말이다.






Thanks giving & Christmas Diner


 2017년 큰 명절 2개를 캐나다에서 보냈다. 이 곳 사람들은 특별한 날(--- Day)을 굉장히 신경 써서 챙긴다. 마치 일 년 동안 이 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온 세상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 날을 즐긴다. 모든 상점에서 이 날만을 위한 식탁보, 접시, 식기류 세트 같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사람들은 비용을 들여 집을 꾸미고 분위기를 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는 산타 스웨터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스웨터는 일명 'Ugly Santa Sweater'라고 불리는데, 정장치마에 명품 구두를 신은 멋진 중년 여성분들도 상의에는 이 스웨터를 입고 회사에 출근을 한다.



 이 날들의 하이라이트는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에서 먹는 저녁이다. 칠면조 구이를 메인으로 추수감사절에는 펌킨 파이를, 크리스마스에는 진저 쿠키와 멀드 와인(뱅쇼)을 곁들인다. 트리 밑에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선물 상자가 가득 쌓여 있고, 작은 선물조차도 산타클로스가 그려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쌓여 있다.






 식사가 끝나면 3등분으로 나눠진 캔디 모양의 물건을 하나씩 랜덤으로 나눠갖는다. 이 물건을 뜯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힘이 필요하다. 가운데를 제외한 양 옆을 한 사람이 한쪽씩 잡고 잡아당기면 포장이 풀어지면서 안에 물건이 나온다. 안에는 시시콜콜한 유머가 적혀 있는 종이, 작은 선물(와인 오프너, 귀걸이, 캐리어 택 등), 왕관처럼 쓸 수 있는 종이가 나온다. 이 종이 왕관을 쓰고, 디저트를 먹으면서 보드 게임을 하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지인과 함께 캐네디언 부부의 집에 초대받았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Things in a box'라는 보드게임을 했다. 카드에 적힌 질문 (ex. 당신의 할머니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에 대해 각자 종이에 답을 적고, 그것을 하나씩 펴보면서 누가 쓴 답인지 맞추는 게임이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 잠깐 나눈 대화만으로 답을 맞히다 보니 웃음이 터지는 상황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엄청난 양의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캐나다에서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우리와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내가 고마운 게 더 많은데 "Thank you"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루 종일 만들었을 홈메이드 쿠키와 비스코티, 직접 딴 라즈베리로 만든 잼, 크리스마스 머그컵, 각종 초콜릿 등을 한 가득 안고 집에 왔다. 모든 음식이 밴쿠버 크리스마스마켓에서 사 먹은 것보다 훨씬 담백하고 맛있었다.






VanDusen Botanical Garden


 아침 고요 수목원이 가고 싶었다. 겨울밤 추위에 떨면서 보던 그 불빛들이 그리웠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열리는 밴쿠버의 수많은 불빛 축제 중에서 가장 가까운 Garden을 향했다. 다운타운에서 버스를 탔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아침고요 수목원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데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호수가 있었고, 덕분에 안개가 더욱 자욱이 껴서 불빛들이 꿈속처럼 몽롱하게 보였다가 선명해졌다. 반짝이는 것들 사이에 반짝이고 싶어 하는 내가 있었다.



 촛불을 켜고 소원을 부는 부스를 지나 무료로 운영하는 회전목마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중절모에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 아저씨와 나란히 앉아 작은 말을 탔다. 출구에 위치한 모닥불을 쬐면서 차가워진 손을 녹이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집이 온돌방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서울의 우리 집이었으면 하고 잠깐 바랬다.






Happy New Year

 

 2017년의 마지막 날, 내가 일하는 식당은 정신없이 바빴다. 밴쿠버의 레스토랑들은 크리스마스부터 이어진 긴 휴일에 아예 문을 닫거나, 예약이 가득 차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침 9시에 시작한 일이 밤 9시가 넘어서야 끝났고, 허겁지겁 룸메이트 동생을 만나 거리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 레스토랑의 모든 테이블에는 "HAPPY NEW YEAR"라고 써진 머리띠와 모자가 있었다. 이미 식사에 한창인 사람들은 머리에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 쓰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12시가 다가오자 캐나다 플레이스로 향했다. 이곳에서 매년 새해 자정에 불꽃놀이를 한다. 최근 추워진 날씨에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밴쿠버 사람들이 다 이곳에 모여 있었다. 자정이 되었고 불꽃이 터지면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불꽃은 정말 작은 규모였지만 마지막에 사라지는 한 순간까지 예뻤다. 신나는 비트의 음악이 나왔고, 내가 좋아하는 콜드 플레이의 음악도 재생됐다. 축제 현장 같았고, 기분이 고조됐다. 한국과 무엇이 다를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다민족 국가답게 '애국가(National anthem)'가 나오지 않았다. 매년 티브이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정치인들이 엄중하게 보신각 종을 치는 것과 사뭇 다르게 소리 지르고 춤추면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매년 느끼던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한 씁쓸함이나 책임져야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니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개인 사진들밖에 없어서 정리하지 못한 할로윈도 끝장나게 재밌었다. 일주일 전부터 사람들이 귀신 복장에 섬뜩한 분장을 하고 돌아다녀도 누구 한 명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지하철에 탄 꼬마 아이와 아빠가 같은 코스튬을 입고 있기도 했고 많은 가게들이 거미줄, 호박으로 꾸며졌다. 당일 저녁까지 미루다가 결국 코스튬을 사서 간 펍은 그 어느 날과 비교할 수 없이 재미있었다. 캐나다의 할로윈은 미국보다는 덜한 편인데, 미국 사람들은 할로윈 코스튬과 분장에 100만 원 이상의 비용을 쓴다고도 들었다. 역시 미국 대륙만의 전통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 소개 : 직장인이었다가, 프리랜서였다가, 알바생이었다가, 지금은 캐나다 워홀러. 글 쓰는 것,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다른 것들로부터 삶의 목적을 찾아보려고 노력 중인 20대 후반. 여행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해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계획 중.



>> 밴쿠버 사진 더 보기   INSTAGRAM 



이전 04화 안녕, 어떻게 지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