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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민재 Apr 16. 2024

블랙데이에 만난 사람

지속가능한 취미를 찾는 중입니다 - 수필 쓰기 5

4월 14일 블랙데이에 떠올린 20년 전 밸런타인데이의 기억. 여고를 나온 나는 그날 생뚱맞게도 50명에 가까운 반 친구들 전체에게 가나초콜릿을 선물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 몇 명에게만 주자니 뭔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초콜릿을 받지 못한 친구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쩌면 반장이라는 역할에 너무 몰입했던 걸 지도 모르겠다.


인원이 많다 보니 비싼 초콜릿이 아니었어도 그 당시의 내 기준으로 큰 비용을 들여야 했다. 각각의 초콜릿마다 간단하게나마 메시지를 적고 리본을 묶었던 것도 같다.


막상 초콜릿을 받은 반친구들은 별다르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시큰둥한 모습이 내가 기대한 반응과는 거리가 있어 김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 내가 너무 반 아이들의 눈치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모두에게 초콜릿을 주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쳐서 그랬다면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나는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날의 내 솔직한 기분은 괜한 오지랖을 떨었다 싶어 씁쓸했던 것 같다.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해봤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차라리 주고 싶은 친구에게 초콜릿을 몰래 잘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모든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눈밖에 나지 않으려던 당시의 나로선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이 소외감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다 보니 타인에게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이는 공평함에 대한 집착으로 연결되어 밸런타인데이 전날 혼자 끙끙대며 수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몰랐다. 내게 주어진 역할에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혹은 인생의 문제에 항상 정답이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했지 내 마음이 어떤지, 어떻게 하면 내가 기쁘고 만족스러울지에 대한 감이 별로 없었다.


공평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데에 집착하다 보니 친구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표현하고 관계를 가꾸어가는 데에 서툴렀다. 동화책 <줄무늬가 생겼어요>의 카밀라가 아욱콩을 좋아하지만 친구들의 눈치를 보느라 먹지 못한 것처럼.


20년이 지난 지금은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고 즐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내가 좋아하는 감촉의 옷을 입는다. 내 것이 아닌 욕구를 경계할 줄 안다. 내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존중하고 돌보는 것이 먼저이고 내 안에서 사랑이 꽉 채워져 흘러 넘칠 때 자연스럽게 밖으로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만의 아욱콩을 찾아서 맛있게 먹는 데에 집중하다 보면 감사함과 풍요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걸 체험하고 있다.


블랙데이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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