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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민재 Jun 03. 2024

시인과 화가

지속가능한 취미를 찾는 중입니다 - 수필 쓰기 9

오래된 시집에서 내가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놓은 시를 발견했다. 15년 전에 출간된 걸 보니 서른 중반을 향해가던 그때의 내게 이 시가 의미 있었나 보다.


그때는 인생이 플러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줄 알았다. 무한대로 더하기만 하자니 버겁고 무거웠다.


지내보니 인생의 정수는 빼기에 있다. 모을 만큼 모았으면 그다음부터는 빼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버려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을 하나둘씩 내려놓다 보면 결국엔 본질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왔던 그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김환기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인에 대해 검색해 보다가 시인의 다른 시 <저녁에서>의 마지막 구절이 김환기 화백의 그림제목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쓰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호암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보고 느꼈던 전율이 떠올랐다.


화가의 그림이 정점에 오르기 시작하던 시기의 바로 그 그림.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에 대해서 고민과 시도를 거듭하던 화가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확고히 하면서 힘차게 나아가는 발걸음이 선명하게 보이던 그림.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에너지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하는 그림.  


화가는  달, 항아리, 꽃, 그림, 새 등을 즐겨 그리다가 점점 그 형상을 단순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선과 점사이에서 고민하던 화가가 점화로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점으로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 주제를 표현해 나간다. 아마 화가도 그 시기에 중요한 것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진실을 마주한 것은 아닐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내가 형광펜으로 줄 그어 읽던 시를 쓴 시인과 내가 전시회에서 여러 번 다시 돌아와 들여다보고 또 보고하며 감격했던 그림을 그린 화가가 친구였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1960년대  성북동 이웃사촌이던 시인과 화가.

1964년 뉴욕으로 간 화가와 한국에 남은 시인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한다.


1970년 어느 날 시인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멀리 뉴욕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화가는 슬픔 속에서도 붓을 들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점으로 그림으로 담아낸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 주는 것일까."


그곳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시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인과 화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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