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디올과 나 사이

창조성의 재발견

by 전민재

<디올 앤 아이> 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의 첫 컬렉션을 주제로한 다큐멘터리이자 한 디자이너가 첫 컬렉션을 제작하는 8주간의 기록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라프가 디올의 아뜰리에 구성원들과 서로 맞추어가면서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크리스찬 디올이 사회적 자아로서 시작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원래의 개인으로서의 디올이 가진 낯설음과 이질감 등을 라프의 작업과정과 동일선상에 두어 두 사람간의 동질감과 동일시를 보여준다. 영화속에서 라프는 컬렉션이 시작되기 며칠 전 다른 동료와의 대화에서 디올의 자서전을 읽다가 몇 페이지를 보고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너무 자기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커져서 괜히 읽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컬렉션이 다 끝나고 난 후에 보면 좋았을 것 같다고 말이다. 실제로 컬렉션이 열리는 날 라프는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보였다. 뭔지 모를 울컥함이 올라온 것 같았다.


그의 컬렉션을 여는 장소를 꽃으로 뒤덮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실용적인 시선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아름다운 것을 갈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 그 많은 꽃들을 한꺼번에 장식하고 또 얼마안가 그것들이 버려진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웠다. 실제로 그는 컬렉션을 위한 예산에 대해 예민하게 신경을 쓰고 그에 대해 다른 동료에게 문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도 결국은 현실이라는 공간속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 어려움들과 선입견들, 현실적인 이유들로 인한 압박 등에도 불구하고 라프는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는 어떤 아름다움을 실제에 구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 부분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막연히 뭔가를 창작해내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재능에 힘입어 쉽게 작품을 만들어가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공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서 내가 본 진실은 그들 또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야하는 같은 인간일 뿐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해서 기꺼이 그 부담감과 압박을 견뎌내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실현해 내 본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미처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창조성을 내 삶에서 실현해보고 싶은 열망을 알아차리고 있으면서도 내게는 저들과 같은 재능이 없기에 나는 저들처럼 뭔가를 창조해낼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무기력해졌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의 영화를 통해서 엿본 패션 디자이너의 창작과정은 평범한 우리들의 그것과 별다른 바 없어 보였다. 다만 그 압박과 두려움을 얼마나 단단하게 견뎌낼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보였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 과정을 한 번 두 번 이겨 내 보고 나면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서 조금 더 과감하게 자신의 머릿속 생각들을 실행으로 옮겨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창조성이라는 삶의 가치를 향한 용기와 실행인 것 같다. 내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서 현실에서 그 모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실험하고 겪어 나가 보는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은 생각과 아이디어들 중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해 나가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남아있다. 영화속 라프처럼 8주라는 시간적 제한을 두고 기존 크리스찬 디올와 전통과 자신의 미니멀리즘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섞어 새로운 조화를 찾아내야한다는 주제가 딱 떨어진다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주제에 접근하고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 혹은 아쉬움이 든다.


내 스스로 나에게 시간적 제한과 주제를 던져주면 어떨까?


- 시간적 제한은 11월 1일까지. 왜냐하면 출판사들이 내년도 출간계획을 세우느라 원고 수집을 적극적으로 하는 시기이므로.

- 주제는 유방암이라는 역경을 수용하면서 성장한 나의 스토리. 그간의 원고를 모아 기획서와 목차 샘플원고를 정리한다.

- 시스템은 매일 1꼭지씩 글쓰기. 오전 10시-12시 사이.

- 매주 금요일은 목차정리 및 기획서 작성 및 업데이트.


갑작스러운 이사준비로 원고투고의 시간적 제한은 해를 넘겼고 매일 1꼭지를 쓰겠다던 열정은 여기저기 아픈 몸들의 아우성과 잡다한 일상들로 흐지부지되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도전해보겠다는 목표는 놓지 않고 틈틈이 작업 중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 이 영화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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