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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훈 Feb 14. 2024

4. 버스 의자

나에겐 여러 개의 의자가 있어요

버스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있어 각자의 온도가 넘나든다. 생활에 덜 다치도록 녹거나 굳으면서 사람들은 각자 내릴 곳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의 나는 최대한 천천히 녹는다. 가끔은 몇십 분이 지나도록 앉지 못해 이대로 형체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오래 기다릴수록 가슴에는 불이 자란다. 어쩌면 누군가의 불이 내게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멀리 있는 목적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스스로 주먹을 쥐었다 편 것이다. 어깨와 어깨가 닿듯 내게 누군가의 의지가 닿은 거라면, 나에게도 탈 수 있는 욕구가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바깥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무엇이라도 보일까 싶어서. 그러다 가끔 재두루미나 새의 형상을 볼 때, 표정 없는 새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디를 향해 가는가.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창문은 내가 상상을 펼칠 수 있을 만큼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창문의 역할인 것처럼 의연하게. 


올해부터 직장인이 된 나는 출판단지로 매일 출근한다. 집도 파주여서 마을버스를 타고 한 번에 직장으로 갈 수 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 일상을 한 달 넘게 한 셈이다. 푸른 아침에 바깥에 나서면 가장 먼저 숨을 크게 들이쉰다. 경남 사람인 나에겐 여전히 어색한 파주의 차가운 공기를 폐에 새김으로써 이곳에 얼른 적응하려고 속의 공기를 바꿔주는 의식이다. 그렇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면 알 수 없는 기운이 샘솟는다. 혼자서만 듣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노래를 틀며(여기서는 한번 말해보고 싶다. 요즘은 오왼의 리마스터링된 앨범에 수록된 <hiphop>을 듣는다. 내일부터는 오랜만에 빌 스택스의 <NICO(feat.myunDO)>를 들을 것이다. 아침에는 결의를 다지거나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노래를 자주 듣는다) 힘차게 발을 뻗어본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날의 할 일을 생각한다. 맡은 원고의 교정은 어디까지 보았으며,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가득 채운 버스가 온다. 가끔은 탈 자리가 있지만, 대부분은 탈 자리가 없다. 운이 안 좋으면 출판단지까지 서서 사십 분가량을 서서 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탄 버스의 빈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다. 예전에는 멀미가 나서 책을 못 읽었는데, 지금은 무리 없이 독서도 한다. 사람이 많아서 덥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이 속에서 번지면 책을 덮고 생각한다. 최대한 회사와 관련이 없는 생각을. 가령 이렇게 매일 같은 하루를 살다 보면 내가 녹아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직장인들이 회색 인간이 되어 간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고개를 흔든다. 이건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녹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거듭한다. 그러지 않으면 단단한 모서리가 깎여 내가 사라질 테니까. 오히려 녹여서 내가 나를 유지하거나 유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유동적인 인간. 나는 겉으로는 유동적이면서도 속으로는 아주 딱딱한 듯하다. 세상의 변화가 어떻든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환승연애>나 탕후루나 별 관심이 없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을 왜 내가 보고 생각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안 보긴 하지만 가끔은 보는 사람들이 부럽다. 사람에 관심이 그렇게 많구나, 저런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할 텐데 하면서.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면 글을 쓰면 좋을 것 같다. 순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하고, 세상에는 왜 다량의 슬픔과 그것을 희석하고 삼킬 수 있는 소량의 기쁨이 뒤섞인 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한다. 정확히는 인간이라는 종이 궁금하다. 세상에 수많은 직장인은 어떻게 자신을 묶어두는가, 내 생각처럼 버스에서 녹아 부드러운 사람들이 버스 바깥으로 나가 직장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그들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까.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회사의 반대편으로 전력을 다해 뛰어가고 싶진 않을까. 

누군가의 불을 생각한다. 한 사람을 모조리 태울 불이거나, 발을 데워 부지런히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불. 버스에서는 여러 빛깔의 불이 어깨와 어깨를 넘나드니까. 그러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불.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 회사에 다니면서 너무나 하고 싶은 계획이 많은데 실력이 부족해 늘 발만 동동 구르게 되는 불. 이 불이 나를 태우진 말고 조금 더 발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단단한 새의 깃털처럼. 표정 없이 단체로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재두루미 떼처럼.


책을 읽거나 생각에 빠지면 롯데아울렛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내린다. 나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다. 내릴 준비를 하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밖 너머에 시선이 닿는다. 손흥민의 얼굴과 “NEVER GIVE UP”이 적힌 그라피티가 있다. 포기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중얼거린다. 몇십 년 후 경력이 쌓인 편집자가 되어서도 나의 불을 유지해야지. 그러다가 도착한 나의 정류장에 내렸을 때의 하늘은 너무 파래서 오늘도 기분이 좋은 하루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전히 노래는 힙합이어서, 새는 여전히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아서, 나는 아주 조금 녹고 나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찰랑거려서.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새의 표정 없음을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결의일 수도 있겠다고. 그게 아니라면 너무 뜨거운 불을 옮기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어 표정을 지운 거라고. 그 불이 어떤 마음이고 생각이며 목적이든 간에 뜨거운 것.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상상한다. 창문이 여전히 뿌옇게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너머는 나의 상상이고 없음은 상상으로 채워지기 위해 열어두는 문이니까. 나는 문을 열어 오늘의 나를 상상한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가 모든 불을 켜고 거울 앞에 선다. 표정이 없다. 입술을 올리거나 내린다. 나는 오늘도 되어 가는 얼굴로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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