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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훈 Feb 07. 2024

3. 벤치

나에게는 여러 개의 의자가 있어요

데드 리프트는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밀어내는 것. 발로 지면을 밀어 내가 세상과 멀어지겠다고, 죽겠다는 각오로 세상과 멀어지려는 행위이다. 그래서 데드, 리프트일지도 모른다. 몸무게보다 무거운 바벨을 들다 보면 숨었던 영혼이 나를 도와주는 듯하다. 잠자는 영혼이 깨어나 일어난다. 급하게 들면 정말 세상을 뜰 수도 있다. 그래서 과장을 보태자면 찢어지는 살결을 느끼면서 일어나야 한다. 허벅지로 무게를 밀어내는 동안 나는 나와의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된다. 정신과 시간의 방이다. 그러다 결국 우뚝 서게 되면 나는 내 키만큼 세상과 멀어지게 된다. 세상과 거리를 둔다. 나는 거리만큼 세상을 내다볼 수 있다. 무엇이든 거리가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눈은 너무 가까워도 볼 수 없고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없다. 적당한 거리에 놓인 것은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끔 나는 착각한다. 멀리 무엇인가 보인다고, 그러다 보면 정말 멀리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멀리 다가갈수록 멀리 있는 것은 더 멀어진다. 다가갈수록 놓치고 만다. 어쩌면 알면서도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아 삶은 길어지고 나와 세상 사이를 점점 멀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간격 사이에서 보이는 것을 의미라고 부른다면, 아주 멀어질수록 많은 의미를 얻게 되는 거라면 다리에 힘을 더 줘도 좋겠다. 그 의미가 아무런 의미조차 되지 않는다고 해도. 


작년 봄 즈음부터 헬스를 제대로 시작했다. 매일 가면서 나는 영어로 가득한 헬스장 용어를 하나씩 배워나갔다. 랫 풀 다운, 데드 리프트, 벤치 프레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당기고 밀어냈다. 그럴수록 피부가 한 겹씩 벗겨져 몸에 단단한 곡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미가 생겨났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가지게 되는 기쁨. 하지만 무엇이든 가진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잃을 수도 있는 슬픔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다 보니 궁금했다. 이 이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헬스 유튜브를 보며 알아가기 시작했다. 랫 풀 다운은 광배(랫)를 당기는 것(풀)인데 위에서 아래로(다운) 당기는 것이었다. 운동의 이름은 알고 보니 어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문자 그대로 운동의 행위를 설명하는 운동이 있는가 하면 데드 리프트, 벤치 프레스와 같은 운동은 조금 달랐다. 데드 리프트는 ‘이미 죽은 것을 들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려나. 벤치 프레스는 벤치(의자)와 ‘누르다.’의 합성어이다. 의자를 누를 수 있을까? 조금 이상한 운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보니 알게 되었다. 이 운동들이 왜 이런 무섭고 이상한 이름인지 말이다. 

데드 리프트는 정지된 바를 고정된 자세로 들어 올리는 운동이다. 흔히 컨벤셔널 데드 리프트라고 불리는 것이 많은 사람이 하는 데드 리프트의 기본형 자세라고 할 수 있다(아닐 수도 있음). 나는 정말 데드 리프트를 할 때마다 죽을 것 같았다. 첫 문단에서도 언급했지만, 진짜 하다 보면 죽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발로 지면을 밀어낼 때의 그 느낌을 알게 된 후로 아주 무겁지만 들어 올리고 말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것을 해내려 한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건 느낌을 알게 된 이후였다. 처음 운동을 할 때는 100KG를 겨우 들었었다. 요령을 몰라 드는 것에 집중해 상체에 힘을 주고 허리를 주로 썼던 것 같다. 하지만 몸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공부하고 영상을 보다 보니 정확한 자세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 처음 100KG가 가볍다고 느껴졌을 때 느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느낌이 전부인 것도 있었다.

느낌은 이상하다. 무엇이든 알 것 같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 공부든, 문학이든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어느 정도 자신만의 기술을 연마했을 때 어떤 느낌을 넘지 못하면 문턱을 넘어가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심장을 쥐었다가 편다. 운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 어느 문턱 앞에서 헤매고 있다. 벤치 프레스처럼 딱딱한 벤치에 앉아  등으로 의자를 밀어내듯 무거운 무게를 버티는 듯하다. 어쩌면 모든 삶은 점진적 과부하인지도 모르겠다. 점진적 과부하란 점진적으로 무거운 무게를 들어 근육의 크기를 키우는 것을 뜻한다. 운동도, 문학도, 생활도 결국 점진적 과부하가 아닐까. 어렸을 때 살다 보니 살아진다는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살다 보니 살아졌고 그건 세상의 무게를 들다 보니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 듯하다. 내가 아는 강한 어른 몇 명이 있다. 그들은 지금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들고 있는 걸까. 알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이 앉은 벤치가 얼마나 헤져 있는지는 알 수 있다. 번들거리고 구겨진 얼굴이 의자다. 얼굴은 말하지 않아도 삶을 말한다. 나는 살결의 말을 믿는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과 얼마나 거리를 두었을까. 아직 어둡고 캄캄한 것을 보니 멀어지지 못했나 보다. 서른이 되면 조금이라도 세상이 밝게 보일까? 아직 스물일곱인 나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많은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미래가 나의 세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아주 무거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며 서서히 밀어내고 있는 것이겠지. 해진 사람들의 벤치가 반짝인다. 웃는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의자는 대부분 그렇다. 머문 자리가 아름답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당신의 자리에 앉아보는 일.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을 읽어내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해진 벤치에 앉아 온몸으로 무게를 견디며 근육을 찢고 키우는 당신의 어디 근육이 크고 어디가 약점인지 보고 싶다. 당신의 약한 근육을 쓰다듬으며 커다래질 근육에 손톱으로 미리 빗금을 새겨주는 일.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작업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당신의 미래 중 가장 좋은 장면만을 상상하며, 내가 당신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는 것. 그래서 나는 당신의 자리가 궁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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