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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훈 Jan 31. 2024

2. 자세 교정용 의자

나에게는 여러 개의 의자가 있어요

주고받는 일을 잘하고 싶다. 마음에 관해서라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이든 아니든 간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교환에 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두 손을 가지런히 펴고 마음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사람. 동시에 타인의 손에 얹을 나의 물건이 턱없이 작진 않을지 고민하지 않는, 줄 수 있는 만큼 주려는 용기가 가득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한때 뉴스에서는 팬데믹 시기 이후로 많은 사람이 소통을 그만두고 개인주의적 성향을 방패 삼아 살아간다고 했다. 방송을 보면서 원래 사람이라면 전부 그런 심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특히 더 개인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막 걷기 시작할 무렵에 엄마가 식혀두려고 창가에 올려둔 젖병을 혼자 기어가 직접 먹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사람이 개인적이라는 것은 나에게 당연했다. 그런 나는 사람 간의 교류를 힘들어했지만, 사회적 분위기와 생활의 영향으로 어쩔 수 없이 교류를 선택했다. 이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과 섞여 살다 보니 나는 관계에서 어떤 행동이나 대화할 때의 적절한 반응을 하기 어려웠고 마음을 쓰는 것에 서툴렀다. 이해라는 것도 꼭 이것 또는 저것으로 나뉘는 것이 아님에도 정답이 있는 줄 알았다. 모든 과정에서는 결과를 생각하게 되니까. 결과가 모든 것의 종착지이며 마음의 일도 그런 줄 알고 지냈다. 


하지만 마음은 이것 또는 저것과 같은 분류가 아닌 구름의 단위로 세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누군가와의 교류도 그러했다. 나는 나의 바깥이 되어주는, 목적 없이 마음을 열어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을 보도록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의 찬장은 무너져 내렸다. 컵이 깨지고 산산조각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빛에 반사되어 생활이 일렁였다. 멀미가 났다.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 그들을 조금 더 그들의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고 했다. 진정한 이타적 생활자는 무엇인가. 생각할수록 불편한 의자에 앉은 듯했다. 따스함과 빛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 스스로 앉아볼 수밖에 없었다. 


목적 없는 선물을 받으면 무섭다.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본인 돈을 막 써도 즐거워하는 사람, 아무런 날도 아닌데 어디를 다녀왔다고 선물을 주는 사람, 생각나서 연락했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섭다. 이들의 행동은 어딘가 엇나간 듯 보여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깥을 환하게 하여 자신을 더 환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본 결과, 이해보다는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마음의 물성은 엇나가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는 이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애써 이해하고 녹아들고 싶어 더욱 문학을 공부했던 것 같다. 문학에서는 처음 본 사람도 연대를 하고 서로의 차양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내게 문학은 삶의 지침서 같기도 했다. 논리와 이해타산의 세계에서 헤매던 나는 시를 쓰면서 길을 구경했다. 이해가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용기를 가지려고 했다. 논리의 바깥 저편에 있는 시를 읽고 쓰다 보면 종종 나만의 해답처럼 보이는 것을 따라가게 된다. 그 길에서 마음은 논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바깥을 넓힌다. 생활은 경중을 따지거나, 타인이 주는 것을 버거워하거나 두려워할수록 어긋나게 된다고 시가 내게 알려준 듯했다. 

문학으로 알게 된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쓰거나 읽는 용기는 제쳐두고 보아야 하는 것을 보려는 용기. 특히 시에서는 그게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직면해야 할 것을 보고 파헤쳐서 그것을 느끼는 과정에 충실할 것. 나는 이러한 용기가 부족하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그러했고 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부족함을 알 때마다 정말 알고 싶었다. 어긋나도록 가만히 두는 것은 어떤 것이며 무엇이 필요로 한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애쓸수록 멀리 돌아가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떤 시를 쓰면서 갑자기 생각이 스쳤는데, 나는 개인적인 성향이면서도 계속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개인적인 것과 사람을 생각하고 좋아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일지도 모른다고, 이러한 생각이 나를 많이 흔들었다. 나는 개인적인 사람이니까 타인과의 교류를 줄여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타인을 적극적으로 내 삶에 초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궁금해졌다. 무서웠다기보다 설레었다. 여기서부터 나와 바깥의 경계가 흐려지고 울타리가 부러졌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도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받는 건 생활을 통해 적응했지만, 내가 주는 건 서툴렀기에 스스로 극복해 보고 싶었다. 다만, 내가 무엇이든 주는 것이 어떤 반복적인 교육이나 의도에서 이뤄지는 게 아닌, 직접 주고 싶다고 솟구치는 마음에서부터 일어났으면 했다.

내가 쓴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용기를 가졌지만 실천하지 않는 화자였다. 저 생각을 하고부터는 시든 생활이든 아주 천천히 움직였던 것 같다. 창문을 열고 수백 마리의 멧비둘기를 창밖으로 날리듯이. 이해보다 먼저 나의 눈으로 평화가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평화를 어떻게 쓸지는 손에 쥔 사람의 몫이지만, 나는 평화를 나의 방식으로 건네보고 싶다. 


여전히 나는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선물을 고르거나 좋은 말을 건네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보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나는 주변에 가득한 용기를 훔쳐본다. 용기를 잘 키워보려 한다. 언젠가 누가 훔치고 싶을 만큼 커다랗게 키울 것이다. 평생 교정하며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좋은 미래에 닿는 길이라면, 조금은 참을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더 편해질 수도 있으니까.

지금도 내 손에는 누군가의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작지도 크지도 않아서 손에 딱 맞다. 그래도 조금은 무겁다. 타인에게 받은 마음이 무거운 건 나의 힘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을 더 길러볼 수 있는 걸까. 여백을 채워나가는 것처럼 마음을 기르기. 꾹꾹 눌러 담은 밥그릇처럼 담을 수 있을 만큼만 담아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선한 표정으로 빈손에 마음을 놓아보려 한다. 겨울을 버틸 수 있도록 오래가는 따뜻함을 양손이 빈 사람에게 몰래 주고 싶다. 용기를 가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문학이고 시일 것이다.  행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오늘은 조금 더 멀리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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