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여러 개의 의자가 있어요
무엇이든 순식간에 무너지진 않는다. 서서히 흔들리다가 쓰러지고 무너지는 일련의 단계가 있다.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생활은 커다란 사건이 닥치지 않는 이상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견고하게 쌓아왔고 무너지게 두지 않을 사람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려는 힘이 있으나 그 힘으로 인해 오히려 생활이 무너지기도 한다. 마치 흔들의자의 흔들림에 버티려는 사람처럼 멀미를 앓듯 살아가는 시간이 자신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다 멈추기라도 하면 세상 모든 어지러움이 찾아와 몸을 괴롭힌다. 그것은 혼란을 버텨낸 자의 기쁨이라 할지 외면했던 슬픔의 두통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어느 쪽을 고르든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서서히 곪아가는 뿌리를 가지게 된 것이면서 착각한다. 자신의 커다란 뿌리에 실금을 그어 여러 갈래로 찢고는 땅을 부여잡을 뿐 사람은 절대 단단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그 얇고도 질긴 뿌리가 우리의 삶을 조금씩 지탱하여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게끔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러질 못한다. 나는 조금 늦고 손에 힘을 많이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래 슬퍼하고 후에 기쁨 대신 안도한다. 나를 흔들었던 진동과 기울기에 관하여 말한다면 많은 수식어와 부사가 필요할 것이다. 명사는 붙일 수 없다. 흔들림에는 명사가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추상적인 느낌 속에서 벗어나느라 지칭할 대상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마다 흔들의자에 앉아 서로 흔들리는 탓에 주변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과 연대가 필요하고 이와 같은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도 각자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어루만져 서로가 버틸 만한 흔들림을 가지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흔들리진 말고 앞과 옆 그리고 뒤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보면서 살기 위한 것인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주변이 살아야 한다. 이것은 올해 내가 배운 첫 번째 교훈이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나는 올해 대학을 졸업해서 아무 연고도 없는 파주의 끝으로 상경했다. 원래 고등학생 때부터 상경을 원했지만, 이렇게 상경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멘탈이 약한 나는 몇 가지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원래 혼자 살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고, 사람 만나는 걸 불편해 했으니 마음을 잘 보살피자는 다짐이었다. 초반에는 헬스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며 바쁘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공허함이 심해졌다. 나는 돈도 벌지 못하고 시인도 못 되었으면서 무엇을 위해 꾸역꾸역 살고 있지? 이 질문은 나의 뿌리에 실금을 만들었다. 그렇게 흔들의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밥을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던 것을 하지 않았다. 매일 청소기로 방을 정리하던 것도 멈추고 입었던 옷을 아무 곳에나 던져두고 침대에 오래 누워있었다. 침대가 관처럼 느껴졌다가 후에는 방이 하나의 커다란 관처럼 느껴졌다. 피라미드에서 서서히 말라가는 시체처럼 나는 숨 쉬는 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희망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희망을 두고 도망친 사람 같았다. 주변에 다른 이들은 상을 받고, 시를 발표하고 하다못해 책이라도 읽는데 나는 정말 하는 것이 없었다. 하는 것이 없다는 건 나에게 큰 사고다. 사람의 쓸모를 늘 찾던 나에게는 말이다. 정말 무용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함께 지내는 페페론치노와 아스파라거스의 마른 잎을 보았다. 그때 나는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살아갈 쓸모가 있지 않겠냐고, 물을 주고 햇빛이 잘 들도록 통창에 둔 화분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생각했다. 페페론치노와 아스파라거스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만 살아보자고, 그 후에는 다시 생각해 보자고 다짐했다.
식물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를 돌보았다. 그들을 분갈이하면서 살아가려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게 되었다. 흙을 털 때마다 아주 가느다란 뿌리가 서로를 옭아매어 놓지 않으려는 힘. 그것은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나의 흔들림을 식물에게 보여주었고 식물은 내게 손에 힘을 주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흔들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나의 균형을 잡으면서 눈앞의 세계가 뒤엉키고 흔들려 쥔 것을 쏟는 세계가 아님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목격만으로도 부여잡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 사람은 두 손을 심장에 대고 안도하는 것일까. 그렇게 손에는 여러 빗금이 생기고 그걸로 누군가를 잡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손은 손의 역할을 훌쩍 넘어 울타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