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여러 개의 의자가 있어요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에게 남은 건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의자였다. 누군가 앉았던 의자들은 멈추지 않을 것처럼 흔들거리기도 했고 눈이 내린 다음 날처럼 차갑기도 했지만, 언젠가 내가 앉게 될 것 같았다. 흔들의자, 철제의자, 바퀴 달린 의자… 의자들은 제멋대로 놓여 있어 어디에 앉든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나는 하나씩 앉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앉았던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아무래도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걸 본다고 해도 사람은 서로 다른 걸 볼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앉았던 이들이 언젠가 돌아와 다시 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 논리나 합당한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의 자리를 내가 계속 관리하고 싶었기에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의 주인들은 돌아와 자신이 남기고 간 의자에서 보던 장면이 어땠는지 내게 물어볼 것이다. 나는 눈앞의 풍경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가장 많이 닳아서 부드러운 것
어쩌면 보이지도 않을 투명한 흰 머리카락에 가까운 이야기
옆에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잠시 멀어졌을 뿐이라고, 그나저나 의자에 앉았던 이들은 없어지지 않았다면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는 조금 사소하고 어쩌면 너무나 개인적이다. 그들은 인간이거나 마음이어서 나의 사소한 약지이기도 하다.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계속 눈이 가는 것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나는 관심을 주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른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만, 나는 사랑보다는 조금 더 이상하고 덜 따뜻한 감각으로 부르려 한다. 그렇게 매번 다르게 호명한 나의 분신들. 멀리서 왔다가 내가 앉아 본 적도 없는 의자만 두고 떠난 얼굴들. 혼자만의 시간을 지날 때면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를 떠올려본다. 마치 일부러 거기 두고 온 사람처럼. 지리멸렬한 흔적을 다시 맞추다 보면 전혀 다른 문양이 나오거나 모르는 기록이 등장해 놀라기도 한다. 가끔은 빛, 가끔은 어둠과 같은 모습은 아니다. 대부분 바래서 얼룩진 청바지 엉덩이 같은 흔적이다. 살과 오래 닿아 누렇게 변색이 된 와이셔츠다. 천천히 마음을 손으로 문지른다. 아주 투명해질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다 발에 걸리면 넘어지거나 코가 깨지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일이 일어나는 당시에는 알지 못하고 꼭 시간이 지나서 놓친 것을 알아채곤 한다. 눈치가 없던 탓일까. 그렇게 놓친 것들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놓친 것들을 영원히 놓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평선을 보며 배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놓친 것들을 기다린다. 마치 중국의 속담 중 기다리면 알아서 강을 타고 원한을 가졌던 사람의 시체가 떠내려올 거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렇대도 마주하게 되면 놀란다. 주우려다 코가 깨지고 손이 얼어 내가 쥐고 싶은 것이 차가울까 봐 심장에 손을 얹어 손을 녹인다. 어쩌면 일부러 이러한 짓을 하기 위해 놓치게 된 건 아닐까. 세상은 커다랗고 복잡한 의도로 이루어진 박스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박스를 여는 쪽보다는 박스 내부를 상상하는 사람에 가깝다. 존재하는 의도를 상상하여 뒤틀기. 그곳에서부터 나에게 주어진 의자들이 만들어졌다.
나는 남들이 두고 간 의자를 계속 닦는다. 언제나 돌아오면 편히 앉으라고. 하지만 내가 이야기할 때 내가 기다리는 것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씩 앉아 보면서 눈앞의 풍경에 걸맞은 나의 이야기를 중얼거려도 좋지 않을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먼저 해보고 실컷 혼나려 한다.
의자를 닮은 이야기는
흔들거리고
딱딱하고
차갑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해서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나의 언어로 옮긴다.
가장 아늑한
투명의자에서 일어나
나의 속이 전부 보인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