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책 읽을 때마다 갈등하는 당신께
자신의 수준에 맞는 영어책을 고르려면 두 페이지에 걸쳐 모르는 단어가 5개 이하인 책을 고르라고 말씀드렸다. 아무리 쉬운 책을 고른다 해도 영어 소설을 읽다 보면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 단어들을 다 찾아봐야 하나?
여기에서는 단어를 안 찾고 읽는 '안찾파'와 단어를 찾으면서 읽는 '단찾파'의 주장을 각각 들어보기로 하겠다. 자, 당신의 선택은?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기껏해야 두세 개 되는데, 그걸 굳이 다 찾아야 하나? 그 정도는 그냥 감으로 이해하면 되는 거지. 모르는 단어 두세 개, 이해 안 되는 문장 두어 개 있다고 해서 그 책을 못 읽는 것도 아니니까.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수십 개면 어떻게 하냐고? 어허~, 큰일 날 사람! 그 정도 되는 책은 내 수준보다 훨씬 어려운 거니까 당연히 읽으면 안 되지. 매직 파이브 얘기도 못 들어 봤나?
한글 책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 일일이 찾아보는 사람 봤어? 명문장의 대가이신 김훈 선생님의 <칼의 노래> 알지? 거기에 나온 문장 몇 개 예로 들어볼게.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 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
저무는 해가 마지막 노을에 반짝이던 물비늘을 걷어가면 바다는 캄캄하게 어두워갔고, 밀물로 달려들어 해안 단애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체었다. 시선은 어둠의 절벽 앞에서 꺾여지고, 목측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캄캄한 물마루 쪽 바다로부터 산더미 같은 총포와 창검으로 무장한 적의 함대는 또다시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 칼의 노래 by 김훈 (문학동네)
칼의 노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단락이야. 읽어보면 대충 저녁이면 멀리 있는 섬부터 안 보이고, 아침에는 멀리 있는 섬부터 잘 보인다는 얘기라는 걸 알 수 있지. 해가 진 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에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적의 함대에 대한 얘기라는 것도 알 수 있고.
저 세 문장에 나오는 단어들 중 "박모", "물비늘", "단애", "뒤체다", "목측", "물마루" 등의 뜻을 모두 다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단어들 중 모르는 게 있다고 바로 국어사전을 펼쳐들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많지 않을걸. 그냥 "감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거지.
영어도 그렇게 읽으면 되는 거 아니야? 꼭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알 필요는 없잖아. "감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사람이 머리가 있으면 굴릴 줄도 알아야지. 무슨 말이냐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이게 무슨 뜻일까, 앞뒤 문장을 보면서 유추해 볼 줄도 알아야지. 어떻게 매번 사전을 찾아볼 수 있겠어. 책을 읽을 때마다 사전에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단어 찾느라 글의 흐름이 깨지면 읽는 것도 더 힘들다고. 앞뒤 문장 슬쩍 보면 대충 어떤 뜻인지 감이 온다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모르는 단어의 뜻을 유추하는 건 시험 볼 때도 아주 유용해. 생각해 봐. 시험을 보는 도중에 사전을 꺼내들 수는 없잖아? 그럴 때는 모르는 단어의 뜻을 유추하며 읽는 수밖에 없지. 평소에도 이런 식의 독서를 해온 사람이라면 시험 볼 때 문제 지문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당황하지 않을 걸.
그러니까, 사전 따위는 안 찾아봐도 된다고. 안찾파, 만세!
자, 그럼 이번에는 단찾파의 주장을 들어보자.
단어의 뜻을 모르면서 자신이 읽은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야. 더군다나 이건 모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읽는 거잖아. 단어 뜻을 다 알아도 행간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눈치챌까 말까인데, 단어 뜻도 모르고 그냥 읽겠다고? 오, 노! 말도 안 되지!
게다가, 우리가 킹 더 그레이트 세종, 세종대왕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한글로 쓴 책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영어로 된 책을 읽는 이유가 뭐겠어? 책을 읽는 온갖 장점과 더불어 바로 영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잖아. 그런데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면, 실력이 늘겠냐고! 영어 책을 백날 읽어봐야 모르는 단어는 여전히 모를 텐데. 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바로 사전을 찾아보는 건 힘들 수도 있지. 단어의 앞뒤 문장을 보며 먼저 단어의 뜻을 유추해 보는 것도 좋은 습관이고. 그런데 그거 아니? 자신이 유추한 단어의 뜻이 맞았는지는 반드시 사전을 보고 확인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엉뚱하게 유추한 뜻으로 잘못 알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이러나저러나 사전은 꼭 찾아봐야 된다니까! 단찾파, 만세!
나는 웬만하면 단어를 찾는 편이다. 특히나 전자책으로 읽을 때는 단어를 찾는 게 무척이나 쉽기 때문에(그저 단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기만 하면 되니까) 찾지 않고 넘어갈 이유가 없다. 종이책을 읽을 때도 옆에 핸드폰을 놔두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단어는 인터넷 사전으로 바로바로 찾아본다.
하지만 때론 단어를 안 찾고 넘어갈 때도 있다. 주로 공부에 좀 질렸을 때나 귀차니즘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단어 찾고 외우느라 힘들어하는 머리에 휴식을 주고 싶을 때는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대충 유추하면서 설렁설렁 읽는다. 한 마디로 때에 따라 '안찾파'와 '단찾파'를 자유롭게 오간다는 말씀.
하지만 귀차니즘 때문에 단어를 안 찾고 읽다가도 꼭 사전을 뒤져보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여러분이 혹시 '안찾파'라 할지라도 아래 경우라면 꼭 단어를 찾아보시길 권하고 싶다.
1. 단어가 중복해서 나올 때
모르는 단어가 나왔는데 귀찮아서 그냥 넘겼다. 그런데 몇 장 뒤에 가니 그 단어가 또 나온다. 어라? 조금 뒤에 또 나오네? 이렇게 반복되는 단어는 a) 아주 중요한 단어이거나 b) 기본 단어이거나 c) 단어 자체로는 중요한 게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는 단어다. 그런 단어는 반드시 뜻을 찾아봐야 한다.
2. 모르는 단어가 드문드문 있을 때
모르는 단어가 서너 페이지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드문 있을 때. 이럴 때는 모르는 단어가 별로 없으니까 단어도 안 찾고 그냥 막 읽고 싶겠지만, 오히려 이런 때 나오는 단어들을 찾아보는 게 좋다.
모르는 단어가 적다는 건 그 책이 내 수준에서는 굉장히 쉬운 책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 정도 레벨에 나오는 단어는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내 수준이라면 그 정도는 꼭 알아둬야 하는 단어들이다. 사실 서너 페이지에 하나 정도면 그리 귀찮은 수준도 아니지 않은가?
3. 단어는 다 아는데 해석이 안 될 때
내가 다 아는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인데 해석이 안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문장 안에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숙어(idiom), 구동사(phrasal verb) 등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숙어와 구동사를 많이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런 단어들도 꼭 찾아보고 공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