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선 매일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무언가 다른 삶이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돌아온 일상은 익숙한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때 연차보다 더 짜릿한 건 오후 반차였다. 남들은 아직 일하고 있는 시간에 널널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평일 낮의 다른 세계에 슬쩍 끼어든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때마다 궁금했다. 다들 무슨 일을 하길래 이 시간에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평일 낮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됐다. 요가 수업을 오전으로 옮긴 것도 변화 중 하나였다. 아침에 눈을 뜨고도 한참을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며 뒹굴거리는 사치를 맘껏 부리곤 했다. 이게 백수의 특권이지. 시계를 힐끔거리며 ‘아직 시간 있어’를 반복하다가, 이제 진짜 일어나야 하는 순간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요가원으로 향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출근 시간 대신 요가 수업 시간이라는 마감이 있을 뿐, 어느새 속도가 붙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내가 선택해서 만든 일정인데도, 어딘가 끌려가듯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 이게 맞나?
퇴사 후에 누리는 자유는 곧 막막함이기도 했다. 나를 묶어두던 제약이 사라지자, 남는 건 전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나만의 일상 루틴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방식으로 하루를 짜보기 시작했다. 오전엔 무엇을 하고, 오후엔 무엇을 하고, 자기 전에는 무엇을 하는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당기지가 않았다. 할 일들로 채우는 게 내가 원했던 하루인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퇴사했나? 아닌 것 같은데.
문득, 작년에 심리상담 선생님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음.. 오늘은 재택근무라 좋았어요. 강아지랑 같이 있어서 좋았고, 일에 집중도 잘 됐고요.”
“아침부터 아기자기한 생각들을 하셨네요. 그런데 감정이 아니라 생각을 얘기하셨어요.”
'좋았다'가 감정이 아니면, 나는 지금까지 뭘 느끼며 살았던 걸까. 그동안 한 번도 생각과 감정을 구분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아차렸다.
“그냥 ‘좋다’라고 퉁치신 거예요. 이렇게 계속 퉁치면, 삶도 퉁쳐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정해진 시간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지금,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그 감각을, 이번엔 놓치지 않고 싶었다. 루틴이라는 것도 어쩌면 내 상태를 퉁치지 않고, 잠깐이라도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침을 다르게 시작해 봤다. 눈을 뜨면 핸드폰을 확인하는 대신, 그대로 누운 채로 잠깐 머물렀다. 지금 내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가만히 살펴봤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무언가는 느껴졌다.
주변의 공기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멈춰 있는 느낌. 하지만 그 정적 사이로 전날 밤 스크롤을 넘기며 접한 정보들이 잔상처럼 자꾸 흘러들었다. 방 안은 조용한 것 같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바깥보다는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각에 이름을 붙여봤다.
‘고요’
그날은 하루 종일 ‘고요’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보냈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일부러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차를 내리고,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핸드폰 대신 책장을 넘기며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하나씩 손으로 적어 내려갔다. 세상의 소음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내 안쪽으로 더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한 심심한 날로 지나갔을 하루였을 텐데, 그날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2025.07.01
- 오늘의 키워드: 고요
- 아침 감각: 어제 핸드폰을 너무 많이 봤다. 외부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세상 모든 게 시끄럽게 느껴진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내면도 고요하게 머물고 싶은 날.
- 하루 되돌아보기: 오후부터 저녁까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차도 마시고 필사도 하고 책도 읽으며 세상의 소음과 멀어지는 시간.
고요함을 지난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눈이 조금 일찍 떠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같은 방 안인데도 전날과는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모든 것이 상쾌했다. 가만히 누워 있기보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어딘가로 나가고 싶었다. 그날의 감각에 ‘활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감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평소라면 귀찮았을 외출이 가벼웠다. 옆 동네에 유명하다는 두부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티하우스 하나를 발견했다. 낯선 공간에서 처음 보는 다구들을 만지며 우롱차와 보이차를 마셨다. 카운터 옆에는 차와 관련된 책들이 있었다.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좋아하는 게 하나 생기면 그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
책 속의 문장을 읽는데, 가슴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도 티하우스를 운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찻잔을 데우고, 적당한 온도의 물로 차를 내려 사람들에게 건네는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날씨가 시원해지면 공원에서 차를 마셔봐야지.
2025.07.02
- 오늘의 키워드: 활력
- 아침 감각: 아침에 일어났는데 상쾌해서 움직이고 싶어졌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지는 게 신기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이 이렇다는데 어쩌겠어.
- 하루 되돌아보기: 새로운 식당, 새로운 책, 새로운 찻집을 만났다. 야외에서 차를 마셔도 좋겠구나. 차 모임 나가고 싶다.
노트북 화면을 닫고, 잠깐 멍하니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다르다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내 안에서는 매일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