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의 빈칸을 채운 다정한 만남들

대출 말고, 행복을 당겨 쓰세요

by 은지

예전의 나에게 여행이란 구글 스프레드시트의 빈칸을 채우는 일로 시작했다. 일자별로 행을 나누고, 가고 싶은 장소들을 찾아서 일정을 테트리스하듯 끼워 넣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계획표를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됐다.


하지만 견고한 스프레드 시트가 무참히 박살 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2023년 스위스 여행이었다. 출발 전 일기예보를 보니 일주일 내내 먹구름이 가득했다. ‘에이, 산이니까 날씨가 시시각각 바뀌겠지. 설마 하루쯤은 맑지 않겠어?’라며 애써 정신승리하려 했지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일주일 내내 흐렸다. 소위 '곰탕'이라 불리는 자욱한 안개는 뷰가 좋다는 숙소의 창밖을 하얀 벽지처럼 가려버렸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계획이란 얼마나 무력한지. 흐린 것을 넘어 비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가려던 산은 아쉽지만 포기하고 도심의 성벽을 걷기로 했다.


축축하게 젖은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말도 안 돼. 회색빛 구름 사이로 햇빛 한 줄기가 비치더니, 그동안 꼭꼭 숨어있던 스위스의 거대한 산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지붕 위로 빛이 쏟아지는 풍경은 비현실적일 만큼 압도적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순간에 만난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 계획표 안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던, 예상 밖의 풍경이 눈앞에 쏟아지고 있었다. 2분 정도 지났을까,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산봉우리는 다시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 뒤로도 여러 풍경들을 마주했지만, 예고 없이 쏟아진 그 찰나만큼의 선명함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여행 계획표를 만들지 않는다.






회사에 다닐 때는 틈만 나면 비행기 티켓을 뒤졌다. 당장이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퇴사를 하고 시간이 넘쳐나자, 신기하게도 해외여행이 당기지 않았다. 복잡한 준비 과정을 감당할 에너지가 부족했던 걸까. 연차를 쪼개며 가기엔 아까워 미뤄두었던 국내의 풍경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지기 전, 6월 중순에 2주간의 국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계획표를 만들지 않는 것에서 한술 더 떠서, 숙소조차 미리 정해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단순 관광이 아니라, 나를 보고 싶었다. 내가 어떨 때 가장 나다워지는지, 내 감각이 언제 살아나는지. 그 단서를 계획이라는 필터 없이 맨몸으로 마주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딱 두 곳의 숙소만 예약해 둔 채, 지리산이 보이는 남쪽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했던 숙소 중 한 곳은 친한 직장동료의 추천으로 알게 된, 하동에 있는 고택이었다. 아무리 추천을 받았어도 어떤 곳인지 후기를 찾아볼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냥 예약을 하고 싶었다. 예약을 하자 사장님에게 안내 문자가 왔다. 주차는 여기에 하시면 돼요. 오시면 보이차 한잔 대접할게요.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저녁이 되자 사장님이 차가 준비되었다며 불렀다. 사장님 부부가 어쩌다 하동으로 내려오게 되었는지, 또 어쩌다 숙소를 차리게 되었는지. 따뜻한 차를 사이에 두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인생 계획대로 안 되더라고요. 원래 숙소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여기서 그냥 살려고 했는데, 강아지가 너무 짖는 바람에… 고택이라 방음이 잘 안 되어서 다른 집으로 가야 했어요. 이곳을 그냥 두긴 아까우니, 숙소를 운영하게 된 거죠."


사장님 부부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는 뜨거운 보이차와 함께 내 안의 긴장을 천천히 녹여냈다. 차 덕분일까? 그냥 얘기를 하면 이렇게 오래 못 앉아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이차와 함께 깊어가는 밤



정말 딱 차 한잔만 마시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장장 5시간이 지나있었다. 숙박객들에게 매일 차를 내어주고, 긴 시간 대화를 나누는 사장님이 신기했다.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했지만,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됐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럴 수가 있나요?”라는 나의 질문에 사장님은 손님들에게 차 한잔을 건네는 게 선행을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기회를 준 손님들이 고맙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런 삶이 행복하다고.


그냥 차를 주신대서 앉아있었을 뿐인데,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니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도 있구나. 만약 내가 내려와서 살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아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온기 너머로, 이 나무 탁자를 거쳐 갔을 수많은 이들의 흔적을 그려본다. 여기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파동이 남아있을까. 밤은 깊어가는데, 그 공간만은 서서히 데워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우연히 지도앱에서 발견한 소품샵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굽이굽이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야 했다. 여기가 맞나 싶을 때마다 ‘길 잘못 든 게 아니에요. 조금만 더 올라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손글씨로 된 작은 이정표가 붙어있었다. 이정표를 따라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산속 오두막 같은 공간이 나왔다.


소품샵 사장님은 15년 전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서울에서 내려온 분이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전날 묵은 숙소 사장님과 아주 친한 사이였다. 묘하게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귀촌 이후의 삶이 궁금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니, 나에게 내려오면 분명 좋아할 것 같다고 하셨다. 아무한테나 귀촌을 권하는 건 아니라면서, 예쁜 엽서 하나를 선물로 주시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대출만 당겨 쓰지 말고, 행복도 당겨 쓸 줄 알아야 해요.





행복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단어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낯설었지만, 이 남쪽 마을의 다정함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는 정말 귀촌할 관상인 걸까.


아직은 무언가를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하게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비워둔 자리 사이로,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자꾸 들어왔다는 것. 계획표에는 없던 다정한 순간들이, 내 여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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